경제·금융

理念 과잉시대

검도 9단과 초단이 진검 승부를 겨루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언뜻 고단자의 완승으로 끝날 것 같지만 전문가들의 얘기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상대방이 허깨비가 아닌 이상 자기 팔 하나는 내어 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최근 미ㆍ영 연합군의공세가 눈에 띄게 약화된 반면 이라크군의 반격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교전 양측의 힘이 균형점을 지향할수록 인명피해는 커지게 된다. 또 이 때문에 반전 여론은 더 격화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상대적으로 약자라고 판단되는 측의 지도자는 그 자체의 선(善), 악(惡)과 관계없이 영웅 대접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후세인이 누구인가. 80년 이란과의 전쟁, 쿠웨이트 침공, 91년 걸프전 등 지난 3차례의 전쟁으로 100만명 이상의 자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동의 깡패`다. 또 그의 장남 우다이는 경기에 졌다고 자국 운동선수를 처형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은 아랍권의 정서를 상징하는 인물로 포장되고 있다. 왜 그럴까. 바로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 때문이다. 미국이 미우니까 `적(敵)의 적은 나의 우방`이라는 단선적, 감정적 반응이 나타나기 쉬우며, 특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부상은 인과관계의 분석 없이 대중을 분노로 몰아 넣는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역사책을 들춰보면 우리는 대중의 위대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접하곤 한다. 그들의 말, 즉 여론은 의외로 정확하며 상당부분 올바른 편에 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론은 진실로 유익한 것보다 겉이 번드르르한 쪽으로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다. 비약 같지만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전 시위에서도 이 같은 흔적이 엿보이며,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인지 각종 구호의 행간에는 이념화의 색채도 읽혀진다. 누구인들 반전, 평화, 인권의 당위성에 사족(蛇足)을 달 수 있을까. 그러나 무슨 일이든 선을 행하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악에 대한 대응력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정부가 `고심`끝에 내린 이라크 파병안이 각종 단체의 시위로 여전히 낮잠을 자고 있다. 지금 서울은 이념(理念)의 과잉시대에 진입해 있는 느낌이다. <정구영기자 gych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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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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