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과 메릴린치 매각의 충격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 미국발 금융대지진은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의 융단폭격식 자금투입으로 일단 진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9ㆍ11 이후 최대 하락을 기록했던 뉴욕주가는 폭락 하루 만에 반등세로 돌아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으며 지구촌 다른 시장들도 패닉(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세계 각국의 신속하고도 강도 높은 대응이 불안심리를 진정시키는 데 주효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틀 동안 1,700억달러를 투입하고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을 비롯해 영란은행(BOE)ㆍ일본은행(BOJ) 등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유동성을 공급해 신용경색 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도 4년 만에 금리와 지급준비율을 낮추는 기동성을 보였다.
지구촌이 일치단결해 총력 대응에 나서고 있으니 위기는 진정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가 문제이기는 하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의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는 1세기 만에 한 번 있을 정도의 사건으로 앞으로도 수많은 은행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경고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인내와 고통이 따를 것임을 예고한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 중심의 경제 시스템이 과연 지금의 세계경제에 맞는 패러다임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금융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뜯어보면 이런 식의 금융 시스템이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이다. 잘 알려진 대로 서브프라임 사태는 지난 1990년 이후 계속된 초저금리와 과잉 유동성, 광범위하게 전개된 투자열풍이 고금리라는 된서리를 맞으면서 사단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금리가 싸고 마침 집값 등 부동산 가격이 뛰면서 미국은 물론 지구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부동산투자 열풍이 불어 닥쳤다. 투기자본인 헤지펀드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면서 석유ㆍ금 등 원자재에도 광풍에 가까운 투기붐이 일었다. 그러나 저금리시대가 저물고 고금리 추세가 본격화하면서 신용도가 약한 계층의 연체율이 높아지고 금융기관의 부실이 증폭되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게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1980년대 불어 닥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물결도 이번 위기의 원인(遠因)이라고 할 수 있다. 민영화와 규제완화가 핵심인 신자유주의는 월스트리트에 금융규제 철폐와 파생금융상품 기법 도입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바람은 재산증식 방식을 저축에서 투자로 바꿨고 상업은행 중심의 금융도 투자은행 중심의 금융으로 급속히 바꿔갔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이 같은 자유방임적 경제운용과 투자은행 중심의 자산운용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의미한다. 실물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은 금융산업은 거품이 꺼지면 같이 몰락할 수밖에 없음도 드러났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이기도 한 셈이다. 정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는 자율금융이 위기에 얼마나 취약한지도 여실히 드러났다.
세계 5위 안에 드는 투자은행 가운데 3ㆍ4ㆍ5위 기업이 모두 상업은행에 팔려나간 것도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예금과 대출 위주의 안정적인 상업은행이 수익률은 낮아도 금융시장 안정에 최후의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현란한 금융공학 기법이라는 것도 들여다보면 결국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투자은행들의 파생복합상품이라는 것이 이렇게 거품을 만들어 투자위험을 끝없이 남에게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였고 폭탄이 터지자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꼴이 됐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선진금융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미국식 금융정책의 한계와 투자은행ㆍ파생상품ㆍ금융공학이 얼마나 무모한 머니게임인지도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식 제도가 선진적인 양 착각했던 우리의 사고와 정부의 정책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모방이 아닌 우리 실정에 맞는 최적의 금융 시스템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