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찬밥' 신세이던 민주당 정권이 탄생함에 따라 지난 반세기 이상 지속돼온 일본 정ㆍ재계의 밀월관계에 커다란 균열이 예고되고 있다.
거액의 정치헌금과 두터운 인맥을 통해 일본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깊숙이 발을 담가왔던 재계의 대표단체 게이단렌(經團連)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개혁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현지 언론은 일제히 "이번 민주당의 압승은 자민당뿐 아니라 지난 55년간 자민당 체제를 물심양면으로 지탱해온 게이단렌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변화를 요구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재계는 그동안 '자유경제체제의 보험료'라는 명목으로 게이단렌을 통해 해마다 20억~30억엔에 달하는 자금을 정치권에 제공해왔다. 이 대가로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을 실행하도록 상당한 입김을 행사했다. 특히 이 같은 정치헌금은 집권당이었던 자민당에 집중됐다. 지난 2007년 자민당에 29억1,000만엔의 헌금이 배정된 반면 민주당에 대한 헌금액은 8,000만엔에 불과했다.
게이단렌 역대 회장들 역시 경제재정자문회의 등 정부기관 요직으로 입성해 경제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 유착관계의 생산성을 높여왔다.
일본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정치와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고 정책 결정 과정도 가늠할 수 없는 민주당 체제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와 관련, 민주당은 이번 총선 공약에서 재계를 향해 정당에 대한 기업헌금을 3년 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재계와 정치권의 유착관계를 강제로 끊어내겠다는 것.
민주당이 일본 재계에 기업이윤만 고려하지 말 것을 주문한 점도 주목 대상이다. 총선 공약에서 민주당은 ▦대기업에 지구온난화 대책을 요구하고 ▦제조업 파견근로자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고용정책을 펴겠다고 강조했다.
일본 재계로서는 한결같이 부담스러운 정책들이다.
오카무라 다다시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은 민주당의 파견근로자 금지 방침에 대해 "해외로 제조 거점을 옮겨버리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고 강력한 반발 의사를 표시했다. 오사카 상의회장도 "온난화가스를 대폭 감축한다는 방침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하지만 유착관계인 정ㆍ재계와 상당한 거리감이 생긴다고 일본 대기업 활동 위축이나 정권의 재계 배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정치와 재계의 연계가 완전히 끊어질 수는 없다"며 "재계와의 유착관계가 희박한 민주당 집권은 재계가 보다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금을 매개로 한 직접적인 로비활동과 밀실 협의에서 벗어나 언론과 토론회 등 공개적인 루트를 통해 정치권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또 대기업의 투자활동이 하청기업과 자영업자, 개별 근로자 고용에 이르기까지 파급효과를 미치는 상황에서 민주당 집권이 당장 대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실제 일본 재계도 변화에 대한 불안감 못지않게 민주당과의 정책 협의 의지와 스스로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게이단렌의 한 간부는 "민주당이나 자민당이나 보수정당이기는 마찬가지"라며 "이번 기회에 게이단렌도 과거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의식개혁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