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8일] 2·28 사건

1947년 2월28일, 타이베이시. 시민과 학생 만여명이 시청사로 모여들었다. 요구는 하루 전 밀수담배를 단속하면서 무고한 시민을 사살한 책임자 처벌. 상점도 문을 닫고 공장은 조업을 중단했다. 사태는 대만 전역으로 번졌다. 소요를 확산시킨 것은 정복자처럼 대만을 쥐어짠 국민당에 대한 누적된 불만. 일제 패망과 함께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은 기대와 달리 부패 그 자체였다. 요직은 본토 출신이 싹쓸이한 가운데 신문에는 하루걸러 한번 꼴로 부정부패 기사가 실렸다. 경제 상황은 더 나빴다. 400배나 치솟은 쌀값에 불평이라도 하면 군과 경찰이 총을 들이댔다. ‘차라리 일제 식민지 시절이 나았다’는 불만도 공공연히 나왔다. 시위대가 부패척결을 위한 정치개혁을 요구하자 국민당은 유화책을 발표하는 뒤편으로 군대를 끌어들였다. 결과는 학살. 수천명에서 10만명설에 이르기까지 희생자 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1만~3만명이 죽었다는 게 정설이다. 수많은 희생에도 ‘2ㆍ28사건’은 언급 자체가 금기였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륙에서 완전히 밀려난 1949년 발동돼 1987년까지 대만을 지배한 계엄령이 침묵과 복종을 강요한 탓이다. 대만에서는 진상규명 작업이 한창이다. ‘장제스가 학살을 지시했다’는 최근 보고서에 가해자인 국민당이 ‘경제 개발의 공로를 정치 보복으로 되갚는다’며 맞서는 형국은 남의 일 같지 않다. 진상규명은 중국에도 관심사다. 중국이 ‘무력사용’을 경고할 만큼 꺼리는 ‘대만 독립론’이 규명 작업의 진도에 따라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59년이라는 세월 속에 묻히기엔 흘린 피가 많아서일까. 2ㆍ28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양안긴장 심화와 동북아 분쟁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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