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2일,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유태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백작에게 서한을 보냈다. 내용은 ‘유대 민족국가 건설 지지’. 영국 정부의 기존 입장과 정반대였다. 시들어가는 시오니즘 운동에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환호를 올렸다. 테러가 테러를 낳는 중동의 불행이 여기서 커졌다. 팔레스타인에서 1,900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벨푸어선언을 전해 듣고 배신감에 떨었다. ‘전쟁(1차 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맥마흔 서한’과 달랐기 때문이다. 10차례에 걸친 ‘아랍 독립’ 약속을 믿고 영국을 위해 영국군 장교 출신인 ‘아라비아의 로렌스’ 지휘 아래 터키와 피흘려 싸운 베두인(아랍 유목민)들은 항거했지만 소용없었다. 영국은 프랑스와도 ‘전쟁이 끝나면 터키령 중동을 분할 통치한다’는 비밀협정을 맺는 등 아랍을 이중삼중으로 속였다. 영국은 왜 아랍을 배신했을까. 돈과 기술 때문이다.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유대자본이 영국의 전쟁공채 인수를 거부한다면 독일과 전쟁을 치르기 어려웠다. 포탄 제조에 들어가는 아세톤의 대량생산 기술을 유대인 과학자 차임 바이츠만(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갖고 있다는 점도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 배경이다. 벨푸어선언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급증시켰다. 선언 당시 8만명 수준이던 유대 인구가 2차 대전 직후 50만명으로 불어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졌다. 유대인 대신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영국은 2002년 ‘벨푸어선언은 명예롭지 않은 결정’이었다며 우회 사과했으나 세계는 여전히 중동발 불안에 떨고 있다. 단 3문장, 125단어짜리 벨푸어선언이 증폭시킨 혼란과 증오는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그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