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USA'가 해외 기업은 물론 미국 기업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법인세율 때문이다. '세금폭탄'이 무서운 미 기업들은 해외에 막대한 현금을 쌓아놓은 채 투자를 주저하고 있고 자국 내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잔치를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달러 강세 등과 맞물려 지난해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가 지난 2003년 이후 11년 만에 최저치로 줄면서 세계 최대 투자대상국의 지위를 중국에 내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1년부터 연방정부 차원의 외국인 투자설명회를 처음으로 열고 해외 기업 유치에 나섰지만 약발이 거의 먹히지 않는 모양새다.
◇세금 탓 해외에 쌓아놓은 현금만 1조1,000억달러=10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무디스투자서비스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말 현재 금융업종을 제외한 미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은 1조7,330억달러로 전년보다 4% 늘면서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상위 50개 기업이 1조1,000억달러 정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화이자, 시스코시스템스 등 5개 기업이 전체의 25%가 넘는 4,390억달러의 현금을 깔고 앉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 기업들이 본국으로 들여오지 않고 해외에 쌓아놓은 현금은 1조1,000억달러로 1년 전의 9,500억달러보다 15.8%나 급증했다. 전체 보유 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7%에서 64%로 늘었다. 무디스의 리처드 레인 애널리스트는 "역외 현금을 본국으로 들여올 때 높은 법인세가 붙는데다 지지부진한 경기회복세로 투자처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35.0%(주정부 법인세 포함 때는 39.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24.1%보다 10%포인트 이상 높다.
◇자금 필요하면 채권 발행해 조달=미국 기업들은 인수합병(M&A)이나 배당, 자사주 매입 등에 자금이 필요할 때도 해외 현금을 활용하지 않고 회사채 발행과 대출로 충당하고 있다. 실제 최근 오라클·AT&T·애브비·MS 등이 각각 수십억달러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현금 보유액이 1,780억달러에 달하는 애플도 13일 70억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할 계획이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을 인상하기 이전에 싼값에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기업들의 편법 절세를 막기 위해 "법인세를 내지 않으려 미국을 떠나는 기업은 '기업 탈영병'"이라고 맹비난하며 여러 대책을 내놓았지만 부작용만 나타나고 있다. 미 정부는 지난해 9월 법인세율이 낮은 해외 기업을 인수한 뒤 본사를 이전해 세금을 절세하는 이른바 '세금 바꿔치기(tax inversion)' 수법을 막는 규제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법의 허점을 이용해 거꾸로 해외 기업에 피인수되는 기업이 급증하면서 법인세수 감소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다.
◇높은 세금에 발목 잡혀 외국인 투자마저 뚝=미국은 높은 법인세율에 발목이 잡혀 전 세계적인 FDI 유치 경쟁에도 뒤처지고 있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미 FDI 규모는 978억달러로 2003년의 531억달러 이후 11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반면 중국과 홍콩은 각각 1,280억달러, 1,110억달러에 달했다. 외국인의 홍콩 투자 상당수가 본토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 FDI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 셈이다. 달러화 강세에 따른 투자 부담 증가, 유가 하락으로 인한 셰일혁명 타격 등도 영향을 줬지만 법인세가 근본 원인이라는 게 기업들의 주장이다. 최근 전미제조업협회(NAE)가 "미국의 세제 때문에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도전에 직면했다"고 비판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물론 미 정부도 법인세제 개편을 서두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월 기업 세금 공제혜택을 줄이는 대신 법인세율을 35%에서 28%로 7%포인트 낮추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3월 외국인 투자가 1,200명을 초청해 마련한 '선택 USA 투자 서밋'에서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법인세 개혁을 통해 투자환경을 개선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문제는 공화당이 법인세율 인하에 찬성하면서도 자본소득세 인하 등 전면적인 세제개편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골드만삭스는 "올해나 내년에 법인세 개혁이 이뤄질 가능성이 낮다"고 전망했다. 다트머스대 비즈니스스쿨의 매슈 슬로터 교수는 "미국은 숙련기술·법인세·무역정책 등 외국인 기업이 가장 중시하는 세 가지 측면에서 매력이 떨어진다"며 "특히 미국의 정치 리스크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