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 울산지법이 '유족 고용 세습'을 핵심으로 한 현대자동차의 단체협약이 무효라고 판결한 것은 '현대판 음서제'로 불리는 이 조항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사회의 보편적 통념에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용 세습을 핵심으로 한 단협 조항의 법적 정당성을 처음으로 따져본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민법 제103조를 근거로 "일자리가 희귀한 시대에 단협을 통해 채용 세습을 제도화하는 방식은 사실상 일자리를 물려주는 결과를 낳아 우리 사회의 정의관념에 배치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노사 단협을 노조법·근로기준법 등의 노동 관련 법이 아닌 민법을 근거로 무효라고 판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기업경영과 인사에 관한 사항은 사용자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사기업이라고 해서 서로의 이익을 거래하는 방식의 단협 체결은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유족 고용 세습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민적 반발의 강도가 더욱 클 수밖에 없는 현대·기아차 노조 등의 '장기근속 근로자 고용 세습' 문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2011년 '신규채용시 면접대상자의 25%는 정년퇴직자와 25년 이상 장기근속자 자녀로 하고 이들에게 5%의 가산점을 주도록 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담은 단협을 체결했다. 기아차 노조 역시 지난달 정년퇴직자와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직계 자녀 1명에 한해 채용규정에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에 최종 합의했다. 울산 항운 노조의 경우 무려 30년 넘게 고용 세습을 자체 규약에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기업의 인력운용에 막대한 제약을 가하는 고용 세습을 단협에 관철시킨 강성 노조들은 갑(甲)보다 위에 있는 '슈퍼 을(乙)'이나 마찬가지"라며 "이번 판결이 불합리한 단협을 바로잡아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위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을 세습한다고 하면 국민들이 가만 있겠느냐"며 "공식적으로 노사가 일자리 세습이 가능하다고 명시하는 것은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근대적인 관행"이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날 법원이 노사 간 합의사항인 단협을 무효라고 판단함에 따라 앞으로 기업들이 고용 세습에 관한 단협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법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이번 판결이 곧바로 현대차 노조의 해당 조항 삭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확정판결이 나온 상태가 아닐뿐더러 기업조차 1심 판결을 근거로 이미 노조와 약속한 단협 사항의 변경을 요구하기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울산지법의 한 관계자는 "사회 전체에 강제력을 발휘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달리 하급심인 1심의 효력은 소송 당사자들에게만 미친다"며 "노사가 해당 조항의 삭제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법원 판결을 존중하며 단협 사안은 회사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만큼 노조와 함께 판결 내용을 검토하면서 협의를 통해 원만하게 풀어나가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노동계에서는 이번 판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노사 간 단협을 노동법이 아닌 민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은 "노조가 사측과의 논의를 통해 단협을 체결하는 1차적인 목표는 조합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며 "회사에 막대한 기여를 한 뒤 목숨을 잃은 근로자의 유족에 대해 단순한 금전 보상을 넘어 생활보장적 보상을 하는 것을 사회정의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노사 관련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일단 법원의 이번 판단이 1심 판결인데다 개별 기업의 특정 단협 사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면서도 앞으로 판결이 미칠 파장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고용부는 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노사 간 단협 사항에 위반 사항이 확인될 경우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동안 고용부가 노동 관련 법 위반으로 시정명령을 내린 사례는 있었지만 민법을 근거로 시정명령을 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선량한 사회풍속이라는 다소 광범위한 표현이 들어가는 민법 조항을 근거로 법원이 단협을 무효라고 판단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며 "시정명령을 당장 내리기보다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 상황을 예의 주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