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국가 시스템 개조하자] 인허가 서류 등 후진 행태 만연… 계약문화 선진화 시급

■ 2부. 경제 정책에 합리성을 입혀라 <2> 계약서 안 쓰는 대한민국<br>알바 고용 사업장 절반 근로계약서 작성 안해<br>하도급거래 4건 중 1건… 구두·이중계약 강요받아

편의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직원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근로계약서가 없는 탓에 아르바이트 직원은 열악한 노동강도와 불합리한 임금체계 등의 부당대우를 받는다./서울경제DB


"일이 끝난 후 정산하면 판 물건과 받은 돈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몇 십원에서 많게는 몇 천원까지 차이가 나는데 점주는 부족분을 무조건 제가 메우도록 합니다. 고용계약이 명확하지 않으니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시급에서 차감할 수밖에요."

지난해 5개월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 이모(22)씨는 "낮은 임금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점주의 횡포"라고 하소연했다. 아르바이트는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서 작성 의무가 있는 법적 근로에 속한다. 하지만 임금ㆍ휴일 등의 조건을 담은 계약서를 쓰는 곳은 거의 없다. 계약서가 없다 보니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할 수 없다. 연초 고용노동부가 청소년 아르바이트 사업장 919곳을 조사한 결과 서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사업장은 절반 이상인 589곳에 달했다.


계약문화의 미성숙함은 이에 국한하지 않는다. 매년 1,0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를 몇 편씩 제작하며 문화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부상한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일부 대형 영화제작사들은 영화 흥행에 성공하면 수십억원을 벌지만 피땀 흘려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들의 근로계약 실태는 구멍가게 수준이다. 2005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들이 서면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비율은 절반에 불과하다. 이마저 촬영 대기시간, 야간근무 등에 대한 계약이 정해져 있지 않아 제대로 된 보수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용주가 서면계약을 꺼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필요할 때 언제든 근로조건을 바꾸기 위해서다. 경영상황이 악화되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임금을 깎을 수 있고 피고용인이 이를 거부할 경우 언제든 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당국의 적발을 피하기 위해서다. 서면계약서가 없으면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고용인이 당국에 신고할 때 피해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없어 조사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면계약의 부재는 근로조건 악화로 이어진다. 지난해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은 근로자 수는 169만9,000여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0%에 달했다. 대부분은 서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최저임금 규제를 회피하고 있다.


후진적 계약문화는 고용계약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곳이 출판업계다. 출판업계의 후진적 계약관행은 출판권과 저작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주로 불거진다. 저작물에 대한 출판권과 저작권은 전혀 별개지만 '갑'의 위치에 있는 출판사 측이 근거 없이 저작권을 행사하면서 저작물에서 파생되는 이른바 '2차 상품'을 통한 수익을 독점하는 것이다. 이 역시 사전에 권리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후진적 계약문화에서 비롯됐다. 베스트셀러인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인세 문제를 두고 저작자와 출판사가 법적 분쟁까지 벌인 것도 불명확한 계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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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급에서도 후진적 계약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11년 공정거래위원회의 '하도급 실태조사'를 보면 하도급계약을 서면이 아닌 구두로 발주했다고 답한 원사업자 비율은 17.5%에 달했다. 공정위가 권장하는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비율도 68.5%에 그치고 있다.

서면계약 미작성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 위한 꼼수도 적지 않다. 이른바 '이면계약(이중계약)서'가 대표적 방식이다. 대한전문건설업협회가 하청 건설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원청업체로부터 이중계약서 작성을 요구받았다고 답변한 비율이 2007년 기준 25.2%에 달했다. 4곳 중 1곳은 이중계약서 작성을 강요받았다는 얘기다.

물류업계의 불공정계약 관행도 수십년째 사회 문제로 자리잡아왔다. 대한상공회의소 설문조사 결과 화주와의 거래에서 겪는 물류기업의 애로사항으로 기준 없는 단가 후려치기가 24.6%, 불리한 계약관행이 13.8%로 가장 많았다. 명목상으로는 계약이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화주가 운임단가를 제멋대로 변경하는 사실상의 무계약 관행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불공정한 약관 작성 관행도 잘못된 계약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불공정 약관 시정 건수는 120건으로 2008년 이후 5년 연속 100건을 넘었다. 2007년에는 93건에 불과했다. 경제불황이 불공정 약관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난해한 용어를 사용해 소비자들을 속이는 사례가 줄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능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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