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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최신 디지털기기의 체험센터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이 은행 영업점임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빨간색 바탕에 '은행의 미래(The Future of Banking)'라는 문구뿐이다. 바로 DBS의 슬로건이다. DBS 역시 수년 전부터 은행을 직접 찾는, 대면 고객 감소에 대한 우려가 컸다. 그래서 2년 전 본사 3층의 지점을 리모델링하면서 '애플스토어'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줄 것을 주문했다.
고객을 지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종이가 없는(paperless)' 미래의 은행 모습을 상상했고 그렇게 구현된 곳이 바로 이곳 1호 지점이다. 에드나 코 DBS 부사장은 "DBS 역시 매년 지점 방문 고객이 5%씩 감소하고 있다"며 "지점 방문 감소를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단순한 업무가 아닌 재미와 문화를 결합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DBS 고객은 은행 업무를 볼 때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DBS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방문 예약을 하면 문자로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업무처리가 가능한 시간이 표시된다.
자산가를 위한 프라이빗뱅킹(PB)센터는 본사 6층에 마련됐다. 이곳 역시 철저히 예약제로 운영된다. PB센터 문이 열리면 호텔 로비처럼 잘 꾸며진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그 옆에는 아시아 각 유명 지역의 이름을 딴 10개의 미팅룸이 있다. 고객은 이 미팅룸에서 PB와 상담을 진행하게 된다. 고객이 서로 마주치는 일은 절대 없다.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된다.
상상 속의 점포를 현실에 창조해낸, 그리고 고객들의 감성을 미리 읽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 DBS의 핵심 역량은 해외 사업이다. 싱가포르를 포함해 18개국에서 280개 지점을 운영 중이며 전체 수익의 40% 정도를 해외에서 벌어들인다. 홍콩(49개), 태국(43개), 인도네시아(40개), 중국(31개), 인도(12개) 등 아시아를 5개 권역으로 나눴다. 싱가포르에는 우체국은행(POSB)를 합병해 89개 지점이 있다. 은행들이 해외진출의 시작으로 여기는 뉴욕이나 런던에는 지점이 없다. DBS는 철저히 '아시안 웨이'를 택했다.
◇'핀셋 M&A'…"필요한 부문만 산다"=DBS는 지난 2009년 해외진출 전략을 새로 수립한 후 '족집게' 인수합병(M&A) 방식을 주로 활용했다. 해외진출을 위한 M&A에서 은행 전체를 사기보다는 필요한 부문만을 핀셋으로 집은 것처럼 골라 사는 것이다. 국경을 넘은 M&A에서 거대조직을 살 경우 조직문화, 일하는 스타일,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조직 전체를 융합하기 위한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는 설명이다.
중국에서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의 소매 및 상업은행 부문, 싱가포르·홍콩에서 프랑스계 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의 PB사업 부문, 대만 보와뱅크의 우량자산 부문 인수 등이 DBS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족집게 M&A에 성공한 리스트다.
피유시 굽타 DBS 최고경영자(CEO)는 "문화가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은행 전체를 인수하는 일은 너무나 방대해 융합에만 엄청난 에너지를 부어야 한다"며 "국경을 넘은 M&A는 필요로 한 부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부문만 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핀셋 M&A가 가능한 배경에는 이들 진출국의 노동 유연성도 깔려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싱가포르·홍콩 등은 금융 부문에서 노동 유연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라며 "매각되는 쪽도 매수자도 이에 대한 반감이 없다"고 언급했다.
필요한 부문만 골라서 인수한 후 조직과 문화를 융합시켜 실적을 올리는 특유의 전략은 DBS의 핵심 분야 중 하나인 PB사업에서도 확인된다. DBS의 자산관리 플랫폼은 최근 국내 금융지주들이 시도하는 개인자산관리와 기업투자금융의 협업 형태다. DBS는 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지난해 PB 부문에서만 해외를 포함해 10억9,900만싱가포르달러(9,321억원)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2010년(5,060만싱가포르달러)의 두 배를 웃도는 성장이었다.
◇"결국은 문화"…직원 교육에 총력=DBS가 해외진출에서 가장 방점을 두는 부분은 조직문화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 각국 직원들과의 접점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매년 3월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금융가 중심에 위치한 DBS 본사에는 세계 각 지점에서 뽑힌 300여명의 직원이 한자리에 모인다. '리더십 컨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틀 동안 열리는 이 컨퍼런스는 해외 각국의 직원들이 모여 토론하며 서로의 괴리를 좁히는 자리다. 리더십 컨퍼런스가 정례화됐다면 '탈렌티드 컨퍼런스'는 부정기적으로 정보기술(IT)·인사·여신·마케팅 등 전 분야에 걸쳐 진행된다.
해외 지점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 역시 해외진출의 원동력이 된다. DBS는 '특별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해외법인 직원을 위한 3·6개월 과정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코 부사장은 "컨퍼런스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직급을 막론하고 DBS의 가치와 전략, 발전 방향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 DBS가 지향하는 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