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긴급 기자간담회 자리에 선 노무현 대통령. 그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파문을 거론하면서 “제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처신해왔고 크게 틀리지 않았는데 이번에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자신이 무너졌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발언은 언뜻 대통령 스스로의 ‘자괴감’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참여정부가 그토록‘시스템 공화국’을 외쳐왔음에도 정작 청와대 안에서는 노 대통령 독단의 국정운영이 진행돼왔음을 실토하는 것이기도 했다.
재계의 한 임원은 이를 두고 “노(盧)에게 노(NO)를 할 수 있는 참모가 없었던 것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실제로 청와대에서는 최근 대통령의 의중에 맞지 않는 의견을 내는 사람은 아예 주요 정무회의에서 빼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겉으로 드러난 변 전 실장 사태의 근본 책임은 검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전해철 민정수석 등으로 향하고 있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문재인 비서실장 등 참모진 전체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최근 노 대통령이 “깜도 안되는 의혹”이라고 발언, 발목을 잡은 PD연합회 연설의 경우 연합회 측은 당초 영상메시지만을 요청했지만 대통령 스스로 참석하겠다고 고집해 화(禍)를 불러왔다.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외부에 나가면 피해를 입을 줄 뻔히 알면서 참모진이 이를 제어하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다”며 “노 대통령과 오랜 세월 같이해온 문 비서실장마저도 ‘아픈 충고’를 못하는 현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변 전 실장 파문이 단순히 민정수석실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무 기능의 마비와 대통령의 독단에 있었음을 적시한 것이다.
다소의 비약을 담은 것이지만 일각에선 청와대 참모진이 ‘잿밥’에 눈이 어두워 사태의 조기 차단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전해철 민정수석은 개인적인 정치 일정을 이유로 이미 지난 5월 초부터 그만두겠다는 뜻을 표시해왔고 2~3명의 수석들도 총선 출마에 관심을 두고 있는 상황이다.
범여권의 한 관계자는 이를 두고 “마음이 떠난 사람들에게 치열함을 바라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욕심 아니겠느냐”며 “이번 사태를 고리로 비서진 전면 개편이 이뤄질 경우 일부는 오히려 속 시원할 것”이라는 씁쓸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12일 “현재 공식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사람은 없으며 수사(진실)의 윤곽이 잡힐 때 최종 판단하겠다”면서 당장의 개편을 부인하고 노 대통령도 10월 초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서진 일부 개편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에도 개편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도 이런 상황론에 따른 것이다.
청와대의 무너진 시스템을 어떻게 복원할지도 숙제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이번 사태 후 자체적으로 사태 대처 과정의 허점을 되짚어보면서 청와대 내부 인사들의 도덕성 문제 등을 엄중하게 점검하는 감찰 강화 방안을 재정비하고 있다.
하지만 변 전 실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도덕성에 대한 ‘편협한 자만심’과 제 식구 감싸기, 이를 부추기는 노 대통령의 일방 통행식 국정운영에서 비롯된 만큼 시스템 복원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적지않다. 목진휴 교수는 “근본적으로 노 대통령 스스로 변해야 한다”면서도 “지금이라도 청와대 내부에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시스템은 이를 통해 복원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