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만남들 속에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는 부족한 의사소통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갈등과 모순, 혹은 오해와 혼란이 극대화되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오히려 잘못된 의사소통은 문제를 더 복잡하고 끝내는 뜻하지 않았던 파국으로 치닫곤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이런 파국을 맞이할 때 쯤이면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과는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와 다른 누군가로 결론(?)내린다. 나와 다른 누군가라는 생각은 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더 이상의 진전을 포기하게 하며, 관계 개선에 대한 대안에 대해서도 고민의 여지를 넉넉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우리와의 관계 회복을 거절하는 다른 이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의 모습 속에서 나와 가장 유사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의 경험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빨리 잊고 싶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경험을 무시한 채,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완전 별개의 다름으로 정리하고 생각에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결국 깨어짐의 고통은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속엔 다른 이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도 함께 갇히는 비극임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났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고, 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호모사피엔스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의 광기 그 자체인 전쟁을 시작했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특보들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극도의 야만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물론 전쟁이 단순히 사소한 개인의 감정문제, 의사전달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이해관계와 명분들 속에서 나온 결과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쩐지 나는 문화적 차이를 통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야만이, 일상속에서 만나는 우리들의 야만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해서 더 답답하고 우울해짐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김옥랑(동숭아트센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