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가 김준(43)은 국내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하다. 네델란드의 한 피자업체가 김준의 작품 이미지를 상자와 홍보물에 사용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반 고흐, 르느와르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 작가들의 작품에 친근함을 느끼는 것 것과 비슷하다. 각종 초대전과 아트페어 출품으로 애호가들 사이에 퍼진 인기를 넘어 상업적인 작가로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사진과 회화의 접점이 되는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영역 모색
최근엔 가족과 함께 인간적인 작품 창작하려 애써
그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을지로 SKT 타워 앞 대로변으로 나가보자. 봉긋한 곡선미가 살아있는 여체, 뽀얀 살결 위에 선명한 색상의 ‘문신’이 전광판에 가득하다. 작품명 ‘블루 피쉬’. 살 위에 그린 문신인지 문신 속에 살이 스민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림인지 사진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몸을 탐구하는 작가=연희동 주택가에 자리잡은 김준의 작업실. 벽면을 채운 작품을 제외하면 화가의 방으로 보이지 않는다. 취미로 연주하는 여러 대의 기타, 컴퓨터가 놓인 깔끔하고 널찍한 테이블을 보면 기타리스트의 연습실이거나 건축가의 사무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리콘으로 여자의 가슴을 실물 크기로 만든 오브제나 남성 누드 토르소 형태의 라이터 같은 범상치 않은 물건을 보는 순간 ‘몸을 화판 삼아’ 작업하는 그의 방임을 깨닫게 된다. “졸업(홍익대 회화과)을 앞둔 무렵 저의 주된 관심은 성(性)과 섹스를 포함한 ‘몸’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몸에 그림을 그려볼까 몸을 캔버스 삼아 작업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고요. 그렇다고 진짜 사람 피부에 그림을 그릴 순 없었기에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실험을 해 왔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살 같은 느낌의 덩어리를 만들어 작업했고 최근에는 3D로 만든 디지털 피부 위에 작업을 합니다.” ◇몸이 아닌 정신에 새겨진 문신=재료적 실험을 끝낸 작가에게 ‘무엇을 그릴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였다. 그는 피부에 그리는 그림, 즉 문신을 새기기로 했다. “타투(Tatooㆍ문신)는 사회적인 금기지만 인간의 숨겨진 욕망과 강박 관념을 품고 있는 동시에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실제 타투이스트(Tatooistㆍ문신시술자)들을 만나 ‘문신가게’라는 주제로 함께 전시도 열었습니다. 문신 작업 초기에는 동양적 이미지부터 내게 영향을 끼친 팝 아이콘 등을 다루며 내 자신 안에 새겨진 ‘정신적 문신’을 추적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구치ㆍBMWㆍ아르마니ㆍ버드와이저 등 명품 브랜드를 피부에 각인해 소비를 하는 행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관능적 유혹을 담고 있다. ◇나만의 영역 찾기=회화를 전공했지만 작업실에는 물감이나 캔버스는 없다. 작품 이미지는 머리 속 구상 계획을 컴퓨터 3D로 구현하는 것이기에 맞붙은 두 대의 컴퓨터가 주요한 도구다. “축구선수 박지성은 공간적인 플레이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가잖습니까.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인아트(순수미술)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상업적인 테크닉을 이용하고 사진과 회화의 접점이 되는 공간에서 나만의 영역을 찾아 갑니다. 예술의 발전은 영역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으니까요.” 몸을 만들어냈으나 김준이 원한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몸은 아니었다. 바람이 통할 정도로 땀구멍이 숭숭 뚫린 피부는 “징그럽다”는 관람객들의 적잖은 항의도 들었다. 겹쳐진 사람의 몸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몸의 물성을 강조하려고 마네킹처럼 만들어 뻣뻣해 보이도록 했습니다. 제 손등이나 팔을 촬영한 피부인데 일부러 땀구멍이나 솜털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어요. 문신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몸 그 자체보다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정신’이니까요.” 김준은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 ‘타투 인 마이 마인드(Tattoo in my mind)’ 전시를 통해 문신 작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렸고 2005년 사비나 미술관 전시 이후 각종 국내외 아트페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일년에 평균 10회 이상 해외에서 열리는 전시회도 그의 인기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런던ㆍ베를린ㆍ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최근에는 뉴욕의 한 갤러리로부터 전속 제의를 받아 검토중이며 내년 5월께 성사 여부를 확정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오는 11월 홍콩 개인전에 이어 내년 2월 마드리드, 5월 LA 비버리힐즈 등 내년 상반기까지 해외 전시 일정만 해도 빡빡하다. 현재는 을지로 SKT타워 내 전광판 갤러리 ‘코모’와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의 ‘요술이미지’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런던 사치갤러리의 한국작가 그룹전 ‘코리안 아이(Korean Eye)’ 전시에도 소개돼 주목받고 있다. ◇문신 같은 강박들=작가에게는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 그래서 더 공을 들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문신 같은 강박이다. 그래서 김씨는 밖에 있던 작업실을 지난해 연희동 집 안으로 들여놓고 변화를 모색하는 중이다. “화가에게 전통적인 천재의 개념을 적용한다면 작품의 형식적인 아름다움 이면에 숨겨진 비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실체로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대단한 작품이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은 결여돼 있죠. 차츰 비인간적인 작가주의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외부와 고립된 작가정신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지지고 볶는 삶의 온기를 다루고자 작업 공간을 바꾸었습니다. 예전에는 작업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말도 안 했었는데 말이죠. 집에서 작업을 하면서 아내와 부딪히고 아이와 놀면서 나름 홍역을 앓고 있지만 뭔가 새로운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마네킹처럼 차갑고 무미건조한 몸에 체온을 담아내려는 그의 새로운 시도는 어떤 작품에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지 사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