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월 18일] <1597> 죄수 선단, 호주 도착


1788년 1월18일, 호주대륙 동남부. 175톤짜리 영국 범선 서플라이호가 보타니만으로 들어섰다. 1787년 봄 영국을 떠난 지 246일 만의 도착. 이틀 뒤에는 무장함 1척, 수송선 6척, 보급함 3척이 뒤따라 입항했다. '제1선단(first fleet)'이라고 불린 영국 선박 11척이 바닷길 2만5,000㎞를 건넌 이유는 유형지 건설. 미국 독립으로 죄수를 해외로 보낼 길이 막히자 고민하던 영국은 땅덩이조차 파악되지 않은 호주를 유형지로 삼았다. 당초 후보지는 캐나다와 남아프리카.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 편에 섰던 왕당파 식민지인들을 정착시키고 죄수들을 수용할 땅으로 골랐으나 캐나다는 프랑스 세력과의 분쟁 가능성으로, 남아프리카는 향토병과 농업 부적합 지역이라는 이유로 후보지에서 탈락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불모의 호주대륙이었다. 제1선단의 인원은 죄수 788명을 포함해 모두 1,332명. 보타니만에 정박한 선단은 여장을 채 풀기도 전에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보타니만의 지형이 방어에 불리한데다 수심이 낮고 식수도 부족해 고심하던 터에 프랑스 선박 2척이 출몰하자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선단은 26일 시드니만에 짐을 풀었다. 영국의 호주 식민경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죄수 유배가 중단된 1868년까지 호주로 온 영국 죄수는 약 16만명. 죄인들의 소굴인 호주는 어떻게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 4만6,824달러가 넘는 청정 선진국가로 발돋움했을까. 1851년 시작된 골드러시와 '사면' 때문이다. 형기를 마친 죄수에게 시민권을 주고 공직 진출까지 허용하고야 사회적 안정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원주민 대량학살과 유색인종 억압, 전과자 격리ㆍ차별정책을 지속했다면 호주는 갈등과 분열의 대륙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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