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2012 신년 인터뷰]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대기업만 혜택 커지는 빈곤 속의 성장 가속화 북유럽식 복지 도입해야"



성장·복지는 함께 가야… 과감한 재분배 정책… 대기업·부자 부담도 필요
먹거리·교육·의료 사회화… 특별소비세로 재원 마련
유럽위기 최소 5년 지속… 올 한국 수출·수입 둔화… 민생문제에 총력 기울여야


박승(77) 전 한국은행 총재의 이념적 성향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성장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에 가깝지만 정부의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는 진보 내지 개혁론자 쪽에 근접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공격과 존경을 동시에 받곤 한다. 우리 경제학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성향의 원로다. 지난 2006년 한은 총재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한 뒤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까지 자신만의 독특한 경제론을 설파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60년 만에 찾아온 '흑룡의 해'인 2012년 첫날 박 전 총재를 자택에서 만났다. 유럽발 글로벌 재정위기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총선과 대선 등 정치 이슈까지 맞물린 올해 한국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듣기 위해서다.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 전 총재는 팔순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만큼 강한 어조로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자신이 구상해온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경제의 현상황을 '빈곤화 성장'으로 정의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자유경쟁과 개방정책의 토대 위에 정부의 과감한 복지정책을 가미한 이른바 북유럽형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박 전 총재는 지난 4년간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빈곤화 성장'을 촉진한 실패한 정책이라고 단언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습니다. 대기업을 육성하고 부자감세를 해주면 기업들이 투자해 일자리가 창출되고 부자들이 지갑을 열어 소비가 늘어난다는 게 기본전제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제구조하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명제입니다." 대기업들이 국내투자보다 해외투자나 내부유보를 선호하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른바 '트리클다운(낙수) 효과'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는 빈곤화 성장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빈부격차'가 해소됐어요. 기업들이 돈을 벌어들이면 국내에 공장을 세우고 사람을 채용했습니다. 당시에는 경제가 7% 성장하면 기업 이익이 7% 증가하고 가계수입도 7% 늘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요, 돈을 벌어도 국내보다는 해외에 투자합니다. 설사 국내에 공장을 짓더라도 고용유발 효과는 예전만 못합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ㆍ부자감세ㆍ고환율ㆍ저금리를 통해 고성장을 달성한다는 '747공약(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내세웠는데 이는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 즉 빈곤화 성장을 가속화하는 역주행 정책"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기업인 출신인 이 대통령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순수한 사람이다. 경제만 잘 돌아갈 수 있는 정책이면 '우'든 '좌'든 문제삼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순진한 생각이 결국 정책실패를 불러왔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이유도 빈곤화 성장에서 찾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서민정책을 표방했지만 결국 대기업만 혜택을 입고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노무현의 역설'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배는 동쪽으로 몰았는데 실제로는 파도에 밀려 서쪽으로 향한 것입니다. 부동산경기 과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빈곤화 성장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남은 것은 정부의 개입이다. 정부의 과감한 재분배 정책만이 빈곤을 해결할 유일한 해법이라는 게 박 전 총재의 확고한 신념이다. 시장실패를 정부가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총재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방임 정책과 정부 주도의 분배라는 언뜻 양립할 수 없는 정책을 혼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장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나라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만큼 자유경쟁과 개방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유지하지 않고는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곧 대기업ㆍ수출 주도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우리 경제구조상 선진국에 비해 경쟁력이 뒤떨어진 중소기업이나 농업을 앞세운 성장정책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대신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작용인 빈곤은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합니다."

빈곤퇴치를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돌아온 답변은 '세금'이다. 연간 20조~30조원의 세금을 걷어 중산층을 육성하자는 복안이다. 내년도 정부예산 326조원의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는 이 세금에 '특별복지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 전 총재는 "법인소득과 개인종합소득, 부동산 소유에 대해 부가세 형태로 세금을 부과하면 최대 30조원가량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며 "이는 최근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버핏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재원으로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세 가지 요소인 먹거리ㆍ교육ㆍ의료를 단계적으로 사회화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1인 가구 최저생계비인 월 53만원조차 벌지 못하는 국민이 650만명에 달한다"며 "정부는 이들에게 먹거리와 교육ㆍ의료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전 '포퓰리즘' 논란이 일었던 무상급식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대학교육까지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의료체계는 그런 대로 잘 갖춰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에요. 먹거리와 교육을 제공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스웨덴ㆍ노르웨이 등으로 대표되는 북유럽식 복지제도를 도입하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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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나라 국민의 담세율은 19%로 선진국(25% 안팎)에 비해 낮은 수준이고 공적 부담률도 마찬가지"라며 "세금 30조원을 더 걷더라도 담세율이 21~22%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들은 우리나라 법인세율이 높다고 난리를 치지만 각종 비과세 감면혜택을 감안하면 오히려 선진국에 비해 세금부담이 작은 편"이라며 "세금을 올리면 기업들의 투자가 감소한다는 명제는 요즘처럼 대기업들이 현금을 잔뜩 쌓아두고 있는 상황에서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박 전 총재는 오히려 부유층이 자신들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과 부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혜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신자유주의의의 희생자인 서민들과 나눠야 합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미국 부자들이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가난한 사람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화제를 잠깐 돌려봤다. 요즘 급박하게 돌아가는 유럽 사태에 대해 질문했다. 박 전 총재의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지난 20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중국의 부상 덕택에 세계경제는 장기호황을 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제원자재와 주택 가격에 버블이 형성됐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버블이 꺼지면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금융위기의 의미는 이제 세계경제가 20년간의 장기호황에서 저성장ㆍ고물가의 장기침체로 전환됐다는 것입니다."

그는 "최근의 유럽 재정위기는 이런 장기침체 전환국면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장기침체라는 암울한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 뜬금없이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재정위기의 진원지인 남유럽이 부도를 면하더라도 강도 높은 긴축이 불가피하고 그 여파가 상대적으로 재정이 건전한 북유럽과 세계경제에 강한 충격을 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박 전 총재는 "유로존 붕괴를 박기 위해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희생이 불가피한데 이 경우 이들 나라의 성장동력까지 상실되면서 유럽 전체가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을 것"이라며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벗어나려면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박 전 총재가 꼽은 또 하나의 악재는 중국의 고물가다. 그는 "중국에서 복지욕구가 분출하면서 임금이 급격히 상승하고 노사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며 "지금까지 중국이 세계경제 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해왔지만 앞으로는 자동차 정도의 역할밖에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전 총재는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서도 "대외의존도가 높은 만큼 수출과 투자 모두 둔화될 것"이라며 "내년에는 민생문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건전성을 화두로 들고 나온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양극화 해소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만큼 재정확충이 우선시돼야 한다"며 특별복지세 도입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이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김 위원장의 사망은 단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악재임이 분명하지만 후계자인 김정은이 개방경제를 경험한 사람이어서 장기적으로는 호전될 가능성이 많다"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경제의 성장은 한반도 평화가 대전제입니다. 북한은 남쪽을 도울 힘은 없지만 남쪽경제를 붕괴시킬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대북 고립 내지 대결정책은 성공한 사례가 없어요. 현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핵 문제를 해결하지도, 북한의 버릇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남북 긴장만 고조시켰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어 박 총재는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의 대북 포용정책이 더 많은 효과를 거뒀다"며 "김정은 체계 출범을 계기로 대북정책의 일대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전 총재는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대한 당부의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특별복지세 도입 등의 과감한 재분재 정책은 확고한 개혁의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득권의 장벽을 뚫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개혁 성향의 리더가 선출돼 과감하게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제 위기가 올 수도 있어요. 민심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박 전 총재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전경련 같은 단체도 당장 눈앞에 닥친 이익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서정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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