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분명 아쉽게 기회를 놓친 적도 많다.
그중 하나는 금속활자를 발명했을 때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발명품으로 인정받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200여년 앞선 기술력을 가졌지만 서양과 같은 정보혁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서양은 금속활자의 발명을 정보의 대량생산과 시민들의 의식수준 향상으로 연결했고 그 결과 종교개혁ㆍ시민혁명ㆍ산업혁명 등을 이끌어냈다. 반면 우리의 사정은 달랐다. 배우기 어려운 한자, 우리말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한자의 벽에 가로막혀 정보의 대중화에 실패했다. 알파벳이 26자인 데 비해 한자는 그 수가 너무 방대했다. 우리는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두 번째 기회는 한글을 창제했을 때다.
지금은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문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한글은 우리의 문자가 아니었다. 단지 한자의 정확한 음을 적는 표기수단으로만 쓰였을 뿐이다. 사대주의에 젖어 있던 지배계층은 한자 이외의 다른 문자의 출현을 격렬히 반대했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한글의 대중화는 점점 늦어졌다.
그 후 500년이 지난 뒤에야 한글은 비로소 우리의 문자로 인정을 받았다. 만약 금속활자 기술과 한글이 결합했다면, 그래서 대량 생산된 한글이 국민에게 전파되고 정보 대중화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서양보다 더 빠른 발전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21세기는 제4의 정보혁명 시기다.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생산되고 전달된다. 우리나라는 ‘IT 코리아’라 불릴 정도로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력에서 세계를 선도한다. 이런 상황은 과거 우리 역사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500년 전 금속활자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졌던 것에 견줄 수 있다. 과거 금속활자로 정보혁명을 이끌 수 있었듯 인터넷으로 새로운 정보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가 또다시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과거 한자가 차지했던 자리는 어느새 영어가 차지하고 있고 지배계층은 여전히 그들만의 정보를 그들만의 전문용어로 독점하고 있다.
500년 전 우리의 조상들에게 느꼈던 아쉬움을 5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자랑스러운 조상이 되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