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지난 1999년 금리목표제를 도입한 후 총 37번의 금리 변동에서 33번(89.2%)을 25bp(1bp=0.01%포인트)씩 움직였다. 나머지 네 번도 50bp, 75bp, 100bp 등 모두 25bp의 배수였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금리를 100bp씩 조정하는 것보다 25bp씩 점진적으로 움직이는 '베이비스텝(baby step·아기 걸음마)' 정책을 천명하자 전 세계 중앙은행 사이에서 베이비스텝은 '불문율'로 통했고 한은도 이를 따랐다.
한은의 이 같은 베이비스텝을 두고 지난해 한 차례 말들이 나왔다. 사상 최저 기준금리(2%)를 코앞에 두고 우리가 굳이 25bp 단위로 금리를 조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금융통화위원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이주열 총재가 "우리 경제여건상 25bp 정도는 움직여야 금리 조정의 파급효과를 알 수 있다"며 "관행을 깨면 오히려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고 일축하자 '마이크로스텝론'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이 총재가 지난 3일(현지시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기자간담회에서 "미국의 금리 인상이 가까워져도 우리는 금리를 내릴 수 있다"고 밝힌 것을 계기로 추가 금리 인하 기대가 급부상하자 금리조정 보폭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현재는 금리가 사상 처음으로 1%대로 내려앉아 똑같이 25bp씩 움직여도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예전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25bp가 베이비 스텝이 아니라 '자이언트 스텝'이 된 셈이다.
금융통화위원 내부에서도 베이비스텝 수정론이 늘어나고 있다. 최소 위원 2명이 보폭 조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상황이다. 정해방 금통위원은 지난해 8월과 9월 20bp 인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데 이어 하성근 위원도 최근 공개된 의사록에서 '소폭'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금리 인하 소수의견을 내면서 보폭 변화에 힘을 실었다. 금통위 의사록을 보면 지난해 6월부터 보폭 조정 필요하다는 의견이 종종 등장했다.
베이비스텝을 고수하던 한은 집행부의 기류 변화도 감지된다. 5일 한은에 따르면 금통위원 사이에서 금리 인하폭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자 한은 내부에서는 해외 중앙은행의 금리 조정폭과 영향 등을 담은 기초자료 조사에 착수했다. 이는 지난해와 비교하면 상당한 기류 변화다.
당시 한은 고위관계자는 "채권거래용 컴퓨터의 자판도 25bp에 맞춰져 있어 보폭을 변동하면 혼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한은 내부에서는 컴퓨터 자판기 등 하드웨어 문제가 금리 조정폭을 바꾸는 데 걸림돌이 될 수는 없으며 거래 시스템도 바꾸면 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에 따라 한은이 금리 보폭을 베이비스텝 대신 '마이크로스텝(25bp 이내 조정)'으로 바꿀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이 불문율을 깨는 나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 이 또한 한은의 보폭 변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유럽중앙은행(ECB)이다. 25bp씩 움직이던 ECB는 기준금리가 제로에 가까워지자 지난해 6월 금리를 0.25%에서 0.15%로 10bp 인하했으며 9월에도 10bp 내려 0.05%로 만들었다. 인근의 스웨덴 중앙은행(릭스방크) 역시 2월 금리를 15bp 인하해 사상 처음 마이너스로 내렸으며 3월에도 10bp 인하해 현재 -0.25%로 운용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 건너 일본은행은 애당초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일본은행은 2001년을 2월 금리를 0.25%에서 0.15%로 낮췄으며 이후 5~20bp씩 다양한 스텝을 구사해왔다.
우리처럼 금리가 제로 수준이 아닌 나라 가운데 보폭을 줄인 사례도 있다. 덴마크는 기준금리가 2%였던 2009년 5월 관행을 깨고 35bp 인하했으며 이후 5bp에서 45bp까지 고무줄처럼 금리폭을 조정하고 있다. 헝가리도 기준금리가 4%였던 2013년 8월 금리를 20bp 내리며 불문율을 깼으며 이후 10, 15, 20bp씩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