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하락과 서방의 제재에 따른 재정악화로 고전 중인 러시아가 루블화 환율 방어를 위해 변동환율제 도입을 선언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외환시장 개입을 재개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1일(현지시간) 보유외환을 이용해 외환시장에서 7억달러를 매도했다고 3일 밝혔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변동환율제 도입을 선언한 지난달 10일 이후 처음이다.
이날 루블화 가치는 환율개입 선언의 영향으로 전일 대비 1.17% 반등(환율하락)해 달러당 53.1753루블에 안착했으며 4일에도 장중 한때 52.56루블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장 전문가들은 러시아 중앙은행의 개입이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루블화 가치 폭락은 중앙은행의 외환정책 때문이 아니라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러시아 재정난,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한 러시아 경기후퇴 우려로 촉발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무리하게 달러를 방출해 환율저지에 나섰다가는 도리어 보유외환만 소진해 환란 위험을 키울 수 있다. 러시아의 국가부도위험지표가 6월9일 이후 이달 4일까지 불과 5개월 만에 두 배로 상승(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 164.875→364.723)한 점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지난달 러시아 중앙은행이 일일 환율개입과 일종의 준고정환율제인 이중통화거래밴드제도를 전격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도를 조기에 도입한 것도 시장개입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러시아는 올 들어 환율 방어에 900억달러대의 보유외환을 쏟아부었으나 61.8%에 달하는 달러화 대비 루블화 폭락(1월1일 32.8550→12월 3일 53.1753)을 막지는 못했다. 도이체방크의 야로슬라프 리소볼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4,200억달러 정도 남은 러시아 보유외환이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러시아 중앙은행이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을 재개한 것은 통화가치 방어 실패의 책임론이 자국 내에서 비등한 데 따른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현재 러시아 정치권에선 엘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3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여당의 예브게니 피오도로프 의원은 나비울리나 총재가 루블화 가치하락을 주도하고 있다면서 사법당국에 수사를 요구했다. 그는 심지어 러시아 중앙은행에 대해 '역적(enemy of nation)' '극악(maximum evil)'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반역자 취급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