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경영환경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마땅한 투자처가 보이지 않는데 금융비용이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나.”(A그룹의 한 관계자)
국내 대기업들의 회사채 상환 러시는 혹시 모를 최악의 사태에 대비, 보수경영을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이다. 올 들어 원자재ㆍ유가 급등, 미국 금리인상 가능성, 차이나 쇼크 등 대외적 악재에다 참여정부의 경제리더십까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일선 기업들의 불안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다.
문제는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 후퇴다. 그동안 주요 대기업들이 차곡차곡 모은 현금 유동성을 재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기보다 빚 갚는 데 주력한다는 것은 경영안전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끝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글로벌 경쟁력의 기반투자를 뒤로 돌린다는 의미다.
자칫 3~4년 후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 도태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 삼성, ‘채무 제로(0)’ 경영 접어들었다 =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전자ㆍ삼성전기ㆍ삼성SDI 등이 이미 빚이 제로에 가까운 상태로 접어들었다.
특히 삼성그룹은 올초 계열사 경영지침을 통해 ▦재무안정성 강화 ▦현금 유동성 최대한 확보 ▦자산운용 때 안정성ㆍ환금성 최우선 중시 등에 나서도록 하는 한편 개별 기업별로 적정 유동성을 상시 점검하도록 했다.
삼성은 계열사들에 투자원금을 회수하는 기간이 오래 걸리는 장기 회임성 투자는 원칙적으로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았다. 삼성 계열사들이 회사채 만기물량을 모두 자체 자금으로 조달하기로 한 것도 이 같은 자금운용전략 때문이다.
계열사별로는 삼성전자가 당분간 회사채나 CP 등 원화표시채권 발행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는 이미 현금보유 규모가 9조5,000억원에 달해 조만간 부채 규모(3월 말 현재 10조3,984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또 삼성SDI는 다음달 돌아오는 채권을 상환하고 나면 더이상 갚아야 할 회사채가 없으며 삼성전기 역시 국내 채무액이 4,000억원에 불과해 조만간 무차입에 돌입한다.
◇ 여타 그룹들, 투자보다는 빚 갚기 우선 = 국내외 경영환경이 악화됨에 따라 보수적인 자금운용에 나서기는 LGㆍ현대차 등 다른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LG그룹의 한 관계자는 “운전자금을 최대한 적게 쓰는 방식으로 금융비용을 줄이고 있다”며 “올 들어 회사채를 발행한 것도 전자ㆍLCD 등 대규모 투자를 충당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도 현금성 자산규모를 지난해 말 8,898억원보다 90.4%로 늘어난 1조6,944억원(3월 말 현재)으로 늘렸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석유정제 마진이 늘어나 수익은 크게 늘었지만 불확실한 경기에 대비하고 이참에 재무구조를 대폭 개선시키기 위해 현금보유를 꾸준히 늘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투자가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은 불황의 직격탄에 노출돼 있는 중소기업들이 훨씬 심각하다.
인천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K씨는 “투자할 여력도 없지만 설사 자금을 확보한다 해도 투자보다는 은행 빚부터 갚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LG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국내기업의 총투자는 지난해보다 7%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당초 전망보다 4.3% 떨어진 것. 특히 제조업 총투자의 43%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경우 지난해보다 6.1%나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최형욱기자 choihuk@sed.co.kr
송영규기자 sko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