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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성적 욕망이 '자기만의 방' 만들었다

■ 방의 역사(미셸 페로 지음, 글항아리 펴냄)<br>18C 중엽까지 방은 공적 공간 왕·귀족도 독립된 생활 없어<br>근대적 결혼관·성생활이 침실을 사적 공간으로 바꿔<br>고대~현대 방 변천사 통해 인간 삶의 모습 변화 담아

에드워드 번 존스의 1866년작‘케이티 루이스의 초상’ . 침대를 갖춘 별도의 침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세 중엽 이후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그곳에서 우리는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자신과 맞닥뜨리며 삶을 재구성한다. /사진제공=글항아리


러시아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벚꽃동산'은 러시아 귀족사회의 몰락을 어느 귀족의 몰락을 통해 묘사한 작품이다. 첫 장면은 주인공 류보비 안드레예브나가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어릴 때 난 여기서 잤어. 나는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야." 하지만 집은 팔렸고 그녀는 떠나야 할 것이다. (중략) "무대는 비어 있다. 모든 문을 열쇠로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자동차가 출발한다. 정적이 드리운다." 파괴된 집들, 파묻혀버린 방들, 무너진 삶들에 대한 비유다. (620쪽에서 발췌)

안톤 체호프의 작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방은 '삶의 공간'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그곳에서 우리는 잠자고 사랑을 하고 자신과 맞닥뜨리며 삶을 재구성한다.


여성사 연구의 대모로 국내에 잘 알려진 미셸 페로 파리 7대학 명예교수가 방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역사에 주목해 집필한 '방의 역사'가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거처로서 방(침실)이 변모해온 역사와 다채로운 이야기를 아우른 최초의 역사서라는 점에서 매우 기념비적이다. 저자는 방의 개념과 형태의 변천, 그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 삶의 양태를 긴 호흡으로 담아낸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건 아니다. 로마시대 때부터 남성 시민들은 작은 방을 마련하고 '독립'된 생활을 했지만 그것은 일부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20세기까지만 해도 가난한 상당수 농민들은 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했다.


중세의 성에서 르네상스 시대 궁전까지 귀족이나 왕이 건축한 거대한 공간에서도 독자적인 영역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왕이 누렸던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베르사유 궁전을 꼽을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의 '심장'은 왕의 침실이었다. 하지만 왕의 침실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왕을 정점으로 하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위계질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적 공간이었다. 침실 한가운데 있는 난간 안에는 외교 사절처럼 왕으로부터 알현을 허락받은 소수의 사람들과 수석 시종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왕은 침실에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왕은 공식적인 취침 의례가 끝나면 왕비나 정부(情婦)의 처소로 가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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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의 '잠자는 방'인 침실이 사전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파리에서는 전체 가정 중 75%가 한 방에서 지냈다.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사정이 이러니 농촌은 말할 것도 없었다. 1875년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는 알프스 산맥의 주택을 이렇게 묘사했다. "밤이면 바깥의 한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모든 출구를 막는다. 노인들,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 모두가 여러 층으로 된 장롱이 있는 방 하나에서 함께 잔다."

침대를 갖춘 별도의 침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세 중엽 이후였다. 보건 위생학의 발전, 근대적 결혼관의 등장으로 잠자리의 분리가 이뤄졌다. 결혼과 사랑의 일치를 추구한 근대적 결혼관과 더 나은 성생활에 대한 욕망이 커지면서 침실이 사적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다른 방을 통과하지 않고 각자의 방으로 갈 수 있는 복도는 17세기 영국에서 탄생했다. 때문에 개인주의의 기원을 영국 엘리트층에서 찾기도 한다.

저자는 이처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방이 사적인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마치 한편의 대하소설처럼 펼쳐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방은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구체화한다. 방의 공간적 배치는 사회적 지위, 세대, 남녀에 따라 다르며 시대에 따라 바뀐다. "방들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를 재현한다"는 자신의 말처럼 저자는 방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대우주를 조망한 것이다. 75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방을 통해 사회 구조를 조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4만원.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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