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소유물을 빼앗긴 것보다 부모가 죽은 것을 더 빨리 잊는 법이다.” 누군가 종합부동산세를 내야 하는 억울한 심정을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빌려 이렇게 표현했다. 특정 지역에 십수 년 산 것도 죄냐는 항변과 함께.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한번도 집을 사서 돈 벌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냥 우연히 그곳에 집을 샀고, 살다보니 집값이 올랐을 뿐인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들에게 수백만원의 종부세 통지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다. 소득이 없는 퇴직자나 연금 생활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억울함으로 말하자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내 집에서 십수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종부세 대상자 명단에 오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나도 종부세를 내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오는 억울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땅을 치고 분노해야 할 사람은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이사 때마다 전세금을 올려줘야 했고 집값이 급등할 때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투기 목적이 아니라 거주를 위해 집을 산 사람에게 집값 폭등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집값 폭등의 직접적인 책임은 투기를 통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과 이에 기생하면서 그들을 부추긴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절한 부동산 정책을 내놓지 못한 정부에 있다. 하지만 종부세가 사유재산권 침해라든가 징벌적 조세, 더 나아가 국민 편 가르기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집값 폭등의 도의적인 책임마저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값이 올랐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재산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값이 오른 만큼 집을 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집값 상승은 다른 사람의 잠재적인 주택소유권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남의 주택소유권을 박탈한 셈이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지난 수년간 아파트 가격 상승은 점심식사 때마다 심심풀이 땅콩이었고 저녁 술자리의 단골 메뉴였다. 냉정하게 한번 되돌아보자.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는 동안, 집값이 미쳤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나의 아파트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계산해보고 흐뭇해하지는 않았는가. 다른 지역보다 덜 오른 것에 대해 억울해하면서 더 오르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는가. 편 가르기는 그때 시작됐다. 아파트 가격이 올라 조금이라도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면 종부세를 ‘징벌적인’ 조세가 아니라 ‘도의적인’ 조세로 받아들이자.
최근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노숙자에게 매주는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 사진에 담은 작가는 “밝은 웃음을 가진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를 통해 우리 사회가 따스하다는 걸 느꼈습니다”고 적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댓글도 있었고, “아직도 우리나라 살 만하지 않나요”라는 반응도 있었다. 우리는 작은 선행 하나에도 이토록 감동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삭막하고 삶이 힘겹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는 따뜻한 사회, 살 만한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 내걸린 현수막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결코 ○○원 이상으로는 팔지 않습니다. 주택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내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부세가 없어지면 정말 살 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