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파이낸셜 포커스]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 곳곳 파열음

제조업체 출신 금융 CEO 불가능… 주주자본주의 역행하는 탁상행정<br>"금융 경력 없으면 후보 안돼" CEO 자격 규정 논란거리<br>"임추위가 후보자 발굴·검증"… 사외이사 권력화 가능성도


대형보험사 인사팀장인 이동건(가명)씨는 지난달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지배구조 모범규준' 기획안을 만드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모범안은 경영진 및 직원에 대한 성과평가 지표를 만들도록 권고했다.

그런데 경계가 모호했다. 임원은 그렇다 쳐도 직원 분류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만약 팀별뿐만 아니라 직급별로 평가지표를 만들어야 한다면 1,000개가 넘는 각기 다른 지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KB금융사태 등 지배구조 리스크에서 비롯되는 금융사고를 막기 위해 마련한 '지배구조 모범규준'이 출발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지배구조 투명화를 통해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를 막겠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각론이 규정하는 내용이 현장인식이 결여된 탁상행정인데다 자칫하면 사외이사 권력화라는 엉뚱한 결말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확실한 대주주를 둔 보험사·저축은행 등은 주주 자본주의에 역행하는 처사라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8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내놓은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과 관련한 업계의 의견을 오는 10일까지 받고 있다.


71개의 총칙과 4개의 부칙으로 이뤄진 지배구조 모범안 중 금융사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은 경영진 및 직원에 대한 성과평가 지표를 마련하도록 한 53조다. 이 조항은 외형경쟁을 지양하고 장기 성과가 비중 있게 반영될 수 있도록 관련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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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 고위관계자는 "직원 평가와 지배구조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이것은 지배구조 개선을 명목 삼은 월권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CEO 자격을 '금융회사의 목표와 업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자'로 규정한 32조도 논란거리다. 이 조항에 따르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해도 금융사 CEO로 넘어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서 수십년간 인사전문가로 활동하다 금융사로 넘어온 원기찬 삼성카드 사장의 사례가 다시 나올 수는 없다는 뜻이다.

금융계 관계자는 "이 조항을 엄격히 적용하면 금융사 근무경력이 없는 사람은 CEO 후보조차 될 수 없다"며 "금융의 삼성전자를 탄생시키려면 삼성전자 출신 CEO도 영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사외이사의 권력화 가능성도 문제로 지적된다.

14조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가 CEO 후보자를 발굴하고 후보자의 자격요건 충족여부를 검증하게끔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임추위 구성원에 대해 '사외이사가 상당수 포함돼야 한다'고 못 박아놓았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CEO 후보가 되는 부사장·전무급 임원들이 후보자 발굴권한을 지닌 임추위에 사전접촉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사외이사의 자기 권력화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대형보험사 관계자는 "모범안은 사외이사가 주축을 이루는 이사회에 예산 편성권한까지 일임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주주자본주의에 합치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며 "이번 모범안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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