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서울 신라호텔.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과 만나기 위해 호텔에 들어선 구본무(具本茂) LG 회장은 대한생명 2차입찰 참여 여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안하겠다고 짧게 말했다. 정몽헌(鄭夢憲) 현대 회장은 한중 인수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관심없다』고 답했다.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도 같은 질문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지난 5월24일 새 경제팀이 들어선 이후 묘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사실 말이 새 경제팀이지, 이규성(李揆成) 재정경제부장관이 물러나고 강봉균(康奉均)씨가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재경부장관으로 옮기고 노동부장관이었던 이기호(李起浩)씨가 경제수석으로 들어갔을 뿐 종전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경제팀인데도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경제정책도 오락가락 하고 있다.
강봉균 재정경제부장관은 취임한지 하룻만인 25일 『5대그룹이 구조조정도 마무리하지 않은채 신규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며 LG의 대한생명 인수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지난 1일에는 대한생명 입찰을 담당하는 이헌재(李憲宰)금융감독위원장이 나서서 LG의 대한생명 인수는 바람직 하지 않다고 쐐기를 박아버렸다. 대한생명 2차입찰일(7일)을 불과 일주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일주일동안 2차입찰 참여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LG는 결국 입찰 당일에야 불참을 결정했다. 불과 한달전인 5월8일 1차입찰때까지도 LG의 입찰 참여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정부당국이 갑작스레 입장을 바꿔 LG를 배제한 것이다. 대신 한화그룹이 2차 입찰에 참여했다.
1차 입찰때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고 있던 LG가 2차 입찰을 앞두고 한달새 구조조정을 게을리했기 때문인지,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LG는 안된다는 것은 어떤 기준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한국중공업 등 민영화대상 공기업을 노리던 재벌그룹들이 정부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5대그룹을 배제하고도 덩치큰 공기업의 민영화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판단해 교통정리를 해주겠다는 뜻인지 정부당국의 의도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새 경제팀이 느닷없이 5대그룹 개혁의 가속화를 외치고 나선 것은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와 내년 총선, 5대그룹의 사업팽창에 대한 비판적인 국민여론 등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개별 그룹과 권력층간의 신 유착설마저 나오고 있다.
더욱이 이들 새 경제팀은 LG의 대생 인수 불가, 5대그룹의 핵심업종 주력화 등의 주요 방침을 딱 부러지게 공식 발표하는게 아니라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슬그머니 흘리고 있다. 그마나 「구조조정에 주력해야 할 시점에 신규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핵심업종인지 아닌지 판단해봐야 한다」는 등 뜻을 정확하게 알아내기 힘들게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민간기업에 투명경영을 요구하는 만큼 정책당국도 투명한 정책결정 및 집행을 해야 할 시점이다. BOB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