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6월 29일] <1735> 헨리 클레이


앤드루 잭슨 41.3%, 존 퀸시 애덤스 30.9%, 헨리 클레이 13.0%. 1824년 미국 대선 일반선거 결과다. 잭슨은 선거인단 선거에서도 99표로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을 넘지 못했기에 최종 결정권은 하원으로 돌아갔다. 하원의 결선투표에서는 결과가 뒤집어졌다. 2위 애덤스가 3위 클레이의 지지로 6대 대통령에 뽑혔다. 클레이는 약속대로 국무장관 자리를 얻었다. 애덤스와 클레이의 합작이 '더러운 흥정(Corrupt Bargain)'이라며 칼을 갈았던 잭슨은 4년 뒤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권을 따냈다. 정적인 잭슨 대통령과 클레이 상원의원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클레이의 주도로 의회를 통과한 도로건설 법안에 잭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클레이는 중앙은행인 제2합중국은행의 인가시한 연장을 싸고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제2합중국은행을 없애려는 잭슨과 맞서기 위해 클레이는 은행장들을 부추겨 대출을 회수해 시중 자금사정을 경색시켰다. 결국 미국경제는 1837년부터 공황에 빠져들었다. 정치권 간 다툼으로 공황이 일어난 셈이다. 클레이는 1844년 대선에서도 대권을 잡지 못했으나 조정과 타협을 통해 대통령을 조종할 수 있을 만큼 의회 권력을 쌓았다. 29세 상원 진출, 31세 하원의장 등 화려한 경력을 안고 대통령직에 도전해 '권력의지의 화신'으로 불렸으나 1852년 6월29일 75세로 사망할 때까지 백악관에 입성하지 못했다. 정파의 이익을 위해 영국과의 전쟁(1812)을 선동하고 무수한 정치거래의 주인공이었어도 그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된다. 보호관세와 제조업 육성 등 '미국식 시스템'을 주창한 원조이기 때문이다. 클레이 가문은 애국자로도 기억된다. 멕시코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헨리 클레이 2세 중령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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