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유보해왔던 북측이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에서 남측 당국자들을 추방하는 물리력을 행사함에 따라 북한의 비핵ㆍ개방을 조건으로 내세운 MB 정부의 대북정책이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됐다. 당장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에 빠지는 것은 물론 최근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핵 6자 회담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더불어 북핵 문제가 급진전할 경우 북측이 미국만을 상대방으로 인정한 채 남측은 대화의 틀에서 제외하는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최악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른바 북풍이 이슈로 떠오를 수 있어 국내적으로도 적지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MB 대북 정책에 대한 첫 공식 경고 메시지=북한의 이번 조치는 새 정부 출범 후 한달 이상 지속해온 탐색전을 마무리하고 MB 정부의 대북 정책에 첫 공식 압박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북한의 향방을 엿볼 수 있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북측의 조치가 공식 문서가 아닌 구두로 이뤄졌지만 일시적인 반응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새 정부 출범 후 북측이 언론이나 외무성 대변인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불만을 표출해왔지만 구체적으로 우리 정부에 대해 액션을 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압박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으로 정리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남측의 대북정책이 구체화됐다고 보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의 일환으로 공식적인 불만을 표출했다는 뜻이다.
정부 당국자들도 북한의 이번 조치가 최근 남측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대북정책 관련 발언 등이 잇달아 나온데다 한미 정상회담 등을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이달 초 정부가 유엔 인권이사회 기조발언을 통해 북한에 인권개선 조치를 촉구한 데 이어 김하중 장관이 개성공단 경협 사업과 밀접한 중소기업인과의 간담회에서조차 북핵 문제를 거론하자 새 정부에 대한 경고와 압박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분석하고 북측의 추가 반응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북측의 이번 조치에 북한 내부 강경파의 불만이 작용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의회 보고서를 인용, 북 외무성이 조속히 핵 협상을 마무리하려는 반면 군부를 이에 저항하려는 기류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경우 핵 협상은 물론 남북 관계도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남북 관계 당분간 경색 국면 불가피=전문가들은 민간 기구인 개성공단관리위원회가 아니라 남북당국자 간 기구인 남북경협사무소 인원을 철수하도록 한 것은 기업보다는 남측 당국에 대한 북한의 불만 표시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일시적인 압박 메시지를 넘어 남북 관계의 경색 국면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지난 26일 통일부 업무 보고에서 지난해 남북 정상 선언에서 합의했던 해주경제특구ㆍ조선협력 등 북한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경협 사안에 대해 일절의 언급이 없었던 점에 대한 불만도 담겨 있다는 뜻이다. 백승주 한국국방연구원 박사는 “우리 정부는 북측의 요구를 수용해 요원들을 신속히 철수하는 등 북측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 때문에 당분간 남북간 기 싸움이 예상되며 남북관계 숨 고르기가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