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기질 뛰어난 앵커출신 정치인<br>최다득표 의원·최연소 대변인으로 화려한 정계 입문<br>민주당 정풍운동 주도…당의장·통일부 장관등 지내<br>2002 대선경선 패배·노인 비하발언으로 시련겪기도
| 결혼…앵커…의원시절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부부의 모습(왼쪽). 지난 1991년 MBC 워싱턴특파원 당시(위)와 2005년 3월 국회에서 열린 축구경기에서 한 골을 어시스트한 후(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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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확정된 정동영 후보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역정을 걸어왔다. 흔히 그는 성공한 방송인, 전도양양한 정치인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에는 화려한 수식어만큼이나 버거운 고난이 뒤엉켜 있었다.
가난한 고학생에서 명문대 학생으로, 고난의 민주화 투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방송사 앵커로, 또 여권의 간판급 정치인에서 중도하차한 당 의장으로. 그의 인생에는 서광과 그늘이 교차해왔다. 그런 정 후보가 위기에 빠진 범여권 최대 정당의 대표선수로 뽑힌 것은 어쩌면 예고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듯한 귀공자 이미지의 고학생(?)=정 후보는 지난 1953년 전북 순창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가정은 그리 유복하지는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면서도 틈틈이 어머니의 품팔이를 도와 옷감을 만드는 일을 했고 직접 청계천이나 동대문 일대에 옷감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동문들은 처음 정 후보를 대했을 당시 워낙 인상이 반듯했기 때문에 고학생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정 후보는 힘든 티를 내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는 게 동문들의 인물평이다.
◇투사적 자아의 재발견=학창시절부터 정 후보와 친분이 있던 지인들은 정 후보가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한다. 자기 주장을 펼 때는 논리정연했지만 평소에는 앞에 나서서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그의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 동문인 이해찬 전 총리와 가깝게 지내면서부터였다. 유신반대 등 민주화운동권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이 전 총리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치인 정동영의 밑거름이 된 ‘투사적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974년 강제 징집됐던 그는 학생운동 전력으로 인해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로 인해 내부반 생활에서도 고립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민주화에 대한 소신은 꺾지 않았다고 한다.
◇화려한 방송 앵커에서 간판급 정치인으로=그런 정 후보는 1978년 MBC 기자로 입사, 17년여간 방송인으로 활약한다. 정치부 기자와 주미특파원을 거쳐 주말 뉴스 앵커로 발탁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전도양양했던 정 후보에게 1996년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정권교체를 위한 젊은 피를 물색 중이던 새정치국민회의로부터 정계입문 제의가 온 것이다. 이때에도 오랜 지기였던 이 전 총리가 정 후보의 정계 도전을 적극 권유했다. 당시 정 후보의 부인 민혜경씨는 극구 반대했으나 정 후보는 20여일간의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의 정계입문은 화려했다. 최연소 대변인이라는 간판을 달며 정치권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그리고 치러진 96년 총선에서 전국 최대 득표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 단박에 정치권의 기라성급 인물로 성장했다.
◇정풍의 리더에서 고배의 정치인으로=그러나 정 후보의 정치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전패하다시피 해 큰 좌절을 겪었다. 당시 전국 선거를 치르면서 보스정치ㆍ조직정치의 현실 벽을 실감한 정 후보는 당내 개혁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진영을 쇄신하자는 취지의 정풍 운동을 주도하지만 중진들의 역풍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그는 또 한번의 모험을 감행한다. 2004년 ‘민주당 분당’이라는 꼬리표를 감내하면서 탈당,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47석의 꼬마 정당으로 시작한 열린우리당은 그해 17대 총선에서 152석의 거대 여당으로 급성장했으나 정 후보 자신은 그 영광을 제대로 맛볼 수 없었다. 총선 직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발언한 ‘노인 폄훼’ 표현이 불거지면서 당 의장직을 중도 하차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정 후보는 의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참여정부의 ‘황태자’란 별칭까지 얻는다. 하지만 2006년 또다시 시련을 맞는다. 당시 두번째로 당 의장직에 올랐던 정 후보는 5ㆍ31지방선거 패배의 직격탄을 맞아 4개월여만에 다시 한번 중도 하차했다. 거의 정치적 절망 상태나 다름없었다.
◇대통합신당 창당 주역ㆍ대표 주자로 복귀=어느 한순간도 순탄치 않았던 그에게 또 한차례 기회가 찾아왔다. 올 8월 대통합신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을 탈당, 범여권 대통합의 흐름을 주도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 맞수인 손학규ㆍ이해찬 후보를 꺾고 경선 승리의 영광을 얻게 됐다.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다. 범여권 후보 단일화와 당내 갈등 봉합, 대선 승리라는 역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천길 낭떠러지에서도 손을 놓는 대장부가 되겠다”는 절치부심의 승부사. 정동영 대세론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