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28일 `당원동지 여러분게 드리는 글'을 통해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대연정 및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공식 제안했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무수한 추측과 관측을 낳았던 `연정 구상'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필요성과 방식, 조건까지도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연정 구상의 진정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아직은 생소한 `연정' 또는 `대연정'이라는 화두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각종 의문 및 비판론에 대해서도 자문자답 형식으로 자신의 분명한답변을 내놓았다.
◇`연정'을 제기한 이유는 =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연정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여소야대 구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 기저에는 현재 정치구조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심각한 문제의식이 있다. 현재의 정치구조 자체가 비정상적인 만큼 이를 정상화해 `생산적인 정치'로 발전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는 정상적인 정치구조가 아니다"며 "세계 어느나라에서도여소야대 구조로 국정을 운영하는 사례가 없다"며 여소야대가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사례로 노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과 인위적 정계개편에 따른 여소야대 구조해소를 들었다. "여소야대로는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것은 증명한 셈"이라는 게 노대통령의 설명이다.
노 대통령은 "협박이니 매수니 하는 공작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다"며 "이제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정치행위를 통해 정치구조를 정상화해야 한다"며 연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연정이 정치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짚었다. 독재와 타도, 불신과 대결로 점철돼온 한국 정치에 신뢰와 협력, 대화와 타협이라는 원리가 연정을 통해 싹트게 된다는 것이다.
◇ 미국은 여소야대 구조에서도 문제없지 않나 = `여소야대 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연정'이라는 노 대통령의 설명은 "미국은 여소야대의 정치구조 속에서도 국정운영에 별다른 차질을 빚어오지 않았다"는 반론에 직면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런 인식은 맞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한다. "미국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정치문화를 갖고 있고 우리 정치와도 많이 달라 본보기가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 정치가 미국 정치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러나 우리 정치와 미국 정치는 아주 다르다"며 한국 정치와 미국 정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뿐 정당은 정권을 잡지 않는 반면 한국은 정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생각해 당정협의도 하고 여야가 일사불란하게 행동통일을 하는 등 `내각제식 정권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당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미국식 대통령제와달리 우리는 당정협의와 당론투표의 전통이 강하다"며 미국식 대통령제와의 차이를설명했었다.
같은 여소야대 구조라도 대통령이 야당의원들을 만나 '주고받기'도 할 수 있고,협력을 제안할 수도 있는 등 초당적으로 대통령의 정치력 발휘를 허용하는 미국적정치풍토와 다른 한국 정치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얘기다.
최근 조기숙(趙己淑) 홍보수석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을 개별적으로 만나면 야합이라고 비난하고 야당의원이 대통령을 만나고와서 입장이 바뀌면 배신자라고 할텐데 과연 우리 문화풍토에서 대통령의 정치력 발휘가 가능하냐"고 반문한 것이 이같은 맥락이다.
◇한나라당과 '대연정' 실현의 전제는 =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의미하는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대연정'의 전제도 함께 밝혔다.
▲ 한나라당이 주도하고 열린우리당이 참여하는 대연정 ▲내각제 수준의 권력을갖는 연정 ▲ 지역구도를 제도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선거제도의 개편 등이 `대연정의 전제'이다.
우선 `한나라당 주도 대연정'이라는 화두는 대연정의 전제이자 실현 조건이다.
"열린우리당이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참여하는 대연정이라면 한나라당이 응할 리 없다"는 게 노 대통령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한나라당이 대연정을 받아들이는데 대한 소위 `반대급부'는 뭘까. 노 대통령은 "대통령 권력하의 내각이 아니라 내각제 수준의 권력을 갖는 연정"을 그 답으로 내놓았다.
나아가 노 대통령은 "실질적으로 정권교체 제안", "결코 무슨 이익을 취하자는것이 아니다. 정권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어떤 속임수도 없다"며 강도높은 표현까지동원했다.
그러면서 이에 따른 권력이양 방식도 서신에 명시했다. `2단계 권력이양'으로,우선 대통령의 권력을 열린우리당에 이양하고 열린우리당은 이 권력은 한나라당에이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 2년 반 동안 보장되는각종 권한을 왜 스스로 버리려 하느냐다.
노 대통령은 그 답변을 지역구도 극복에서 찾고 있다. 노 대통령은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에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지역구도를 제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선거제도를 고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대연정이라는 틀을 통해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연정에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노 대통령은 "정치생애를 건 목표이자 대통령이 된 이유"라고 밝힌 `지역구도 해소'과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의 대연정 구상은 여소야대라는 `비정상적 정치구조'를 해소하기위한 대안인 동시에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임기 중반의 결단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어떤 선거제도이든 지역구도를 해소할 수만 있다면 합의가 가능할것"이라며 "정치적 합의만 이뤄지면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대연정을 구성하고, 그 연정에 대통령의 권력을 이양하고 선거법은 여야가 힘을 합하여 만들면 된다"고 부연했다.
◇ 민생과 `연정'의 관계는 = 노 대통령이 `연정'을 키워드로 하는 정치구조 얘기를 꺼낸 뒤 "민생이 어려운데 웬 정치구조 이야기냐"는 비난이 일었다.
경제에 올인해야 할 시점에 대통령이 앞장서 정치적 논란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론이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오로지 비난을 위한 논리"라며 지난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 속에서도 수년간 경제가 고속 성장한 사실을 들며 반박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가 잘 돼야 경제도 잘 될 수 있다. 정치가 잘 되려면 정치제도도 잘 돼야 한다"며 "이 낡고 고장난 정치제도로 비정상적인 정치를 계속하자는것이냐"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이치가 어떻든 저는 경제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정치이야기를좀 하더라도 민생과 경제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나아가 노 대통령은 "이제 저의 정권 후반기에는 지속가능한 경제를 뒷받침할수 있는 정치제도를 정비하고자 한다"며 "유능한 공장장이라면 제품 하나하나의 생산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공장의 잘못된 설비를 바로잡고 개량하는 것이 더중요한 일일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또한 "밥이나 부지런히 지을 일이지 주방 설비 손질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논리로 가장 중요한 정치개혁을 비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역사, 노선이 다른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가능한가 =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정당의 역사와 노선을 달리하고 있어, 함께 손을 잡고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의 전신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지난 2002년 대선에서 권력을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고, 현실 정치구도에서 대척점에 있는 경쟁 정당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도 이러한 문제제기에 "일리 있는 지적"이라면서도 "그러나 더 큰 목표와 가치를 위해 그만한 차이는 뛰어넘자고 말하고 싶다"며 대타협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나아가 양당은 소속 의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함께 할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진단했다.
노 대통령은 "실제로 양당의 구성을 보면 그 내부에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어 실제 노선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며 "오히려 연정을 맺고 합동의총에서 정책토론을 하게 되면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당을 넘어 협력하는 것이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소신과 노선에 맞는 자유로운 의정활동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대타협의 결단으로 극복하자"고 강조했다.
◇ '연정'은 대통령제 헌법에서 위헌적 발상 아닌가 = 대통령제 헌법에 따라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된 권력을 다른 정당에게 이양한다는 것은 초헌법적 발상이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것은 우리 헌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우리 헌법은 단순한 대통령제 헌법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합의가 되면 헌법에위배됨이 없이 내각제에 가까운 권력운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설명이다.
과거 정부와 달리 참여정부에서 도입한 국무총리 중심의 분권형 국정운영시스템도 현행 헌법틀내에서 도입된 것이며, 나아가 당초 '연정'의 문제제기가 개헌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청와대의 기존 입장과도 연결되는 설명이다.
노 대통령은 "현행 헌법은 처음부터 그런 운용을 예상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그것이 내각제적 운용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며 "프랑스의 경우도 헌법을 만들때는 동거정부를 상상하지 않았지만 동거정부로 운용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말했다.
◇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너무 가볍게 주고받는 것 아닌가 = 노 대통령은 "국민이 만들어준 권력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하는 정치적 비판도 있다"며 이같은 지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노 대통령?이에 대해 "그러나 그렇지 않다"며 "우리의 정치현실이 변화하여과거와는 다른 융통성있는 권력의 운용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와 함께 미국과 달리 우리 대통령제의 내각제적 운영적 측면을강조하면서, 정치민주화에 따른 당정분리 원칙의 불가피성, 나아가 여소야대 구조에서 '권력 이양' 제안이 나오게 된 문제의식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노 대통령은 "과거처럼 대통령이 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한다면 아무 문제가생기지 않지만, 대통령이 당을 지배할 수 없게된 현실에서는 당정간에 주도권 다툼이 있게 되고, 상징적인 권위와 지도력으로 이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며 당정분리 원칙의 시대적 필연성을 강조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 제도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자는 국민적 여망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선거로 선출되는 국회와 대통령간의 권력 이원화와 그에 따른 정통성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이러한 유연한 정권운용의 필요성은 여소야대 국회하에서 야당이연합해 대통령이 지명하는 총리를 반대하고 스스로 총리 지명권을 행사하려고 할때극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며 프랑스 동거정부는 이같은 정치현실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러한 정치현실을 고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권력의 이양이라는 대통령의 제안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보일지 모르나, 대통령으로서는 비정상적인 우리 정치제도와 변화하는 정치현실속에서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거쳐 나온 결론"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성기홍 김범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