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21일] <1506> 로스차일드


'고대 유대인은 한 왕을 섬겼다는데 요즘(19세기 초)은 유럽의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한 유대인이란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게토에 살면서 16세기부터 집에 방패 모양의 빨강(rot) 간판(schild)을 걸어 '로트실트(Rothschild)'로 통칭된 이 가문이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769년 9월21일. 마이어 암셀(당시 25세)이 하나우공국의 빌헬름 9세로부터 어용상인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빌헬름은 286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난립한 독일 지역의 영주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용병을 양성해 외국에 팔아 부를 쌓았던 인물. 암셀은 옛 동전을 좋아하는 빌헬름의 비위를 맞춰 어용상인으로 지정된 후 금융거래로 지평을 넓히고 다섯 아들을 독일과 오스트리아ㆍ영국ㆍ이탈리아ㆍ프랑스로 보내 순식간에 국제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영어식 발음인 로스차일드로 불린 것도 이때부터다. 나폴레옹 전쟁과 대륙봉쇄령의 와중에서 다섯 형제는 금융거래와 밀수를 통해 유럽의 부를 거머쥐었다. 영국의 수에즈운하 매입과 유대국가 탄생을 현실화시킨 벨푸어선언(1917년)에도 로스차일드의 자금이 깔려 있다. 소극적인 미국 진출 전략 탓인지, 가문의 돈을 지키기 위해 매달렸던 근친혼의 악영향으로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지 않은 탓인지 오늘날 로스차일드의 부는 19세기만 못하지만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다. 로스차일드가 세계를 움직인다는 음모론은 황당하고 빈약한 근거에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세계총생산(WGDP)보다 많은 금(金)을 보유한 이들의 소행이라는 설까지 나돈다. 명성의 흔적은 소문과 명품 와인, 몇몇 금융회사에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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