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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500원짜리 한 개로 기적을 일으켰다
[기업가정신이 창조경제 만든다] 야성을 깨워라500원 지폐로 조선소 차관 따낸 '뚝심의 리더십' 살리자
이재용기자 jylee@sed.co.kr
1974년 6월 울산에서 현대중공업 조선소 준공식 겸 1·2호선 명명식이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울산시민 등 5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이날 행사는 고(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으로 탄생한 현대중공업이 국내외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며 세계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자 오늘날 우리나라가 조선 최강국으로 성장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사진제공=현대중공업
정주영·이병철·구인회·박태준 등 실패 두려워 않는 과감한 결단으로차·반도체 등 주력산업 초석 다져 경제위기 겪으며 도전정신 퇴색기업 다독이는 사회적 환경 만들어 불황에도 과감한 투자 나서게 해야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71년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설립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롱바톰 A&P애플도어 회장을 만났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지폐에 인쇄된 거북선 그림을 롱바톰 회장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은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해외 차관에 대한 합의를 얻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주를 찾는 일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조선소가 들어설 황량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배를 팔러 다녔고 결국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톤짜리 배 두 척의 주문을 받아냈다. 이 같은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당시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던 우리나라가 세계 조선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시발점이 됐다.
이처럼 우리나라 기업의 성장사는 창업세대의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의 역사 그 자체였다. 정주영ㆍ이병철ㆍ구인회ㆍ박태준 등 1세대 기업가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반도체ㆍ자동차ㆍ철강ㆍ조선 등 국내 주력산업의 초석을 놓았다.
전수봉 대한상공회의소 조사1본부장은 "창업세대는 경제발전에 대한 강인한 의지와 도전정신으로 기업을 일으켰고 당시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맞물려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며 "이처럼 확고한 도전정신으로 기업을 다시 일으킬 기업인이 많이 나와야 우리 경제도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 도약의 비결은 과감한 도전정신=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1983년 일흔셋의 나이에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는 이른바 '도쿄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국내외의 혹평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삼성은 도쿄선언이 나온 그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D램을 개발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D램을 개발하며 세계 1위의 D램 회사로 우뚝 섰다. 이 회장은 1984년 기흥 VLSI공장 준공식에서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을 성공시켜야만 첨단산업을 꽃피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삼성의 모든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사업 추진을 결심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구인회 LG 창업주도 1950년대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의 호황에 안주하지 않고 신사업으로 라디오 등 전자산업 진출을 결정했다.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는 "지금 머뭇거리면 앞으로 영원히 선두 자리를 차지하기 힘들다. 지금이 개척자 정신을 보여줄 때"라며 밀어붙였다. 이때 설립한 금성사는 지금의 LG전자로 이어져 한국이 글로벌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됐다.
이들의 도전정신은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우려도 많았지만 결국 기술과 자본ㆍ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한국의 기업가정신이 높이 평가 받고 국내외 경영학계가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기업 정서 해소로 기업가의 야성 일깨워야=국내 기업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창업세대의 도전정신이 약화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와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유가증권과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법인 1,591곳의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지난해 3ㆍ4분기 말 기준 64조2,63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4% 늘어났다. 조사 대상 기업의 3ㆍ4분기 말 내부유보금 총액도 823조3,53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5%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보수경영에 나서면서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것으로 진단했다.
불확실한 경영환경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되는 반기업 정서도 기업이 투자를 꺼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가 극도로 불안해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데다 성공한 기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정서가 만연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반 기업 정서를 해소하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기업이 마음 놓고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 교수는 "투자 의사를 결정하는 기본 단위는 정부가 아닌 기업이며 반기업 정서는 경제에 암적인 존재"라면서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기업을 격려하고 기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게 기업의 도전정신을 자극해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기업인의 사기를 북돋아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는 기업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야성적 충동이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만든 용어로 자신의 판단과 본능에 따라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업가정신을 말한다. 도전정신으로 대표되는 심리적 요인이야말로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의미다.
기업 기죽이는 기업정책세금 부담 늘리고 순환출자 규제대규모 투자·인수합병 발목 잡아앞다퉈 법인세 내리는 미·일과 대조기업인의 기를 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조세정책과 기업정책은 오히려 기업인의 도전정신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권의 법인세 증세 움직임과 기업 순환출자에 대한 규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권은 선거 과정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법인세를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세계 주요국이 기업경쟁력을 높여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법인세 인하 경쟁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실제로 일본은 지난해 4월부터 법인세율을 30%에서 25.5%로 인하했다. 영국은 2011년 법인세율을 28%에서 26%로 내린 데 이어 지난해에는 24%로 낮추고 향후 2년간 단계적으로 22%까지 인하할 예정이다.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법인세율을 현행 35%에서 25~28%로 인하할 계획이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도 지난해 11월 법인세수를 3년간 450억유로나 감세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주요국이 앞다퉈 법인세를 인하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만 법인세 인상에 나설 경우 국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어 투자를 감소시키는 것은 물론 해외 기업과의 경쟁에서도 그만큼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2010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에서 법인세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3.5%로 일본ㆍ미국ㆍ캐나다 등 주요국에 비해 높은 수준이기도 하다.
신규 순환출자 금지도 기업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새 정부는 기업의 기존 순환출자는 인정하되 신규 순환출자는 금지한다는 입장이다.
경제계는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할 경우 순환출자 해소 압박을 받는 기업이 경영권 방어를 위한 현금 확보에 주력하게 되고 결국 기업 성장을 위한 투자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또 경영권 방어수단이 취약한 상황에서 국부 유출도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신규 순환출자가 금지되면 기업의 다양한 출자 방식에 제한을 받게 돼 과감한 투자와 대규모 인수합병이 어려워진다"며 "도요타ㆍ도이체방크 등 세계 유수기업도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 기업과 경쟁하는 국내 기업만 역차별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