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2일 서울의 한 호텔. 이날 이곳에서는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반도체 총괄)을 제6대 반도체협회장으로 재선임하는 ‘경사’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행사의 주인공은 “고맙다” 같은 형식적인 말은 뒤로한 채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 사장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을 둘러싼 환경이 결코 녹록치 않다”며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작심을 한 듯 “글로벌시장에서 ‘타도 한국’을 외치는 선진국 업체들의 합종연횡과 중국의 거센 추격, 특허분쟁 등으로 한국 업체들은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며 “우리는 영원한 1등은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고 우리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 세계 반도체 업계의 거물인 황 사장의 이 같은 진단은 행사에 참석했던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긴장감을 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도체 산업 세계 1위의 대한민국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그 시간에도 세계의 경쟁자들은 한걸음씩 우리의 뒤를 밟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반도체=고수익’ 등식 깨지나= 최첨단 IT산업인 반도체산업은 전통적으로 고수익을 보장하는 ‘황금알’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급격한 가격하락 탓에 이 같은 등식이 붕괴되고 있다. 연초부터 시작된 반도체의 가격하락은 반도체 업계 전체가 우려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주력 제품인 2Gb 낸드플래시 현물가는 연초 1개당 3.84달러에서 지난 14일 현재 2.46달러로 떨어져 무려 30%이상 하락했다. 통상적으로 반도체 가격은 1년에 평균 30%가량 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두달 남짓한 기간동안 1년치 가격하락이 이뤄진 것. 기업 수익성은 동반 급락할 수 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은 2004년 18조2,200억원, 2005년 18조3,300억원, 2006년 19조800억원으로 완만한 상승세를 보인 반면, 영업이익은 7조8,400억원(2004년)에서 5조4,600억원(2005년)으로 내려앉더니 급기야 5조300억원(2006년)으로 떨어져 5조원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민후식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에는 D램 공급이 부족해 가격하락 폭이 15%정도에 그쳤지만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라며 “지난해 이익을 낸 기업들이 하반기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해 현재는 과잉공급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에 특별한 수요촉진 촉매가 없다면 당분간 가격하락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을 겨냥한 공세들= 세계 반도체 기업들은 ‘한국 타도’를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경쟁 업체들끼리 손을 잡고 연합군을 구성해 과감한 투자를 집행하는가 하면, 각국 정부도 반도체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등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업계의 올해 투자액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에 그칠 전망이고, 정부는 하이닉스반도체의 이천 공장 건설을 불허하는 등 오히려 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까지는 기술력이나 양산기술 등에서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등 국내 업체들이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고는 있지만, 파상공세를 펼치는 ‘적’들을 막아내는 데 점차 힘이 부치는 모습이다. 실제 일본의 D램 생산업체들이 합병해 설립한 엘피다메모리는 과감히 경쟁사인 대만의 파워칩반도체와 손을 잡고 1조6,000억원을 투자해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등 한국 기업에 대한 포위공격을 하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TSMC, UMC, 파워칩테크놀로지 등 대만의 6대 반도체 기업들은 올해 지난해 보다 36%나 증가한 9조9,500억원의 투자를 집행할 계획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의 엘피다메모리의 시장점유율은 합병전 4%에 그쳤지만 현재는 10%에 육박하는 등 정부의 지원과 업체간 유기적인 협력에 힘입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며 “일본 반도체 산업 기술력은 우리 보다 한수 아래가 절대 아니며, 대만의 추격도 점차 거세지는 상황에서 국내 업계가 세계 1등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IT산업 “방심하면 기회없다”= 최근 정보기술이 발전하면서 PC에 주로 사용되던 반도체가 모바일 기기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시장이 확대된다는 측면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경기가 불안정하고 급격하게 변하는 IT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크게 영향을 받는 다는 점에서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교체주기가 4년이었던 PC의 경우 비교적 안정적으로 시장변화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제품 사이클이 1~2년 심지어 수개월에 불과한 모바일 기기 등에 대처하려면 보다 빠른 결정과 신속한 준비가 필수적이다. 황창규 사장이 최근 부문별 회의에서 “젊은이들이 열광할 수 있는 IT제품에 들어갈 신개념 반도체를 개발해야 한다”며 “관습에 사로잡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임원은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라”고 다그친 것도 이 같은 위기감의 발로다. 개발 한발만 늦어도 몰락…반도체는 시간과의 싸움
삼성전자, 초기 수율 높이려 스택방식 택해 도시바 따돌려
침체기에 과감한 설비증설 호황기에 급성장 이룩…투자도 ‘타이밍의 미학’ 필요 지난 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반도체 제조방식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당시 4메가 D램 개발 과정에서 스택과 트렌치 방식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스택은 고층 아파트를 짓는 것처럼 표면 크기가 제한된 반도체 칩에 셀을 위로 쌓아 올리는데 반해 트렌치는 지하실을 만드는 것처럼 밑으로 파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문제는 당시 IBM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국업체들과 일본 도시바가 트렌치 방식을 도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고심 끝에 최종적으로 스택 방식을 선택했다. 트렌치 방식은 기술적으로뛰어났지만 초기에 수율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결단은 삼성전자가 92년 D램 부문에서 마침내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성과를 일궈냈다. 반도체산업은 흔히'타이밍의 미학'으로 일컫는다. 이는 시장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고 적절한 순간에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품들을 내놓아야 하는 숙명적인 특성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제품 개발에서 한발이라도 뒤쳐지만 곧바로 몰락의 길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과거 트렌치방식을 고수했던 도시바는 결국 93년 업계순위 4위로 추락하는 등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잃었고, IBM을 비롯한 미국 업체들은 시장 주도권을 삼성전자에 넘겨주게 됐다. 반면 삼성의 경우 1기가 D램을 개발해 반도체 세대교체를 이끌어냈으며 2001년 4기가 D램에 이어 2004년 60나노, 2006년에는 40나노 기술을 적용한 32기가 낸드 플래시메모리를 최초로 개발하는 등 16년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타이밍의 미학'은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87년 일본 업체들이 설비투자를 축소할 때 삼성전자는 오히려 신규라인를 새로 만들었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하지만 이듬해인 88년 반도체 산업은 호황기를 맞자 삼성전자는 그동안 쌓였던 반도체 부문의 누적적자를 한꺼번에 털어버렸다. 지난 91년 경기 침체기에도 삼성전자는 공격적인 투자를 계속해 IT산업 호황을 맞은 90년대 후반 D램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했다. 시장을 보는 정확한 눈과 스피디한 결정이 반도체 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다. 순간의 판단이 하루아침에 기업의 흥망을 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장변화가 빠른 정보통신 산업이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시장으로 부각되는 상황은 기업에게 더 정확하고 더 신속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반도체산업은 하루하루 시간과 피말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최근 불거진 하이닉스반도체 공장 증설논란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