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고뇌와 땀으로 압축성장 이루셨으니 편히 잠드소서

■ 박승 전 한은총재, 남덕우 전 총리 추도문


올해 2월 KBS 프로그램 'TV자서전'을 통해 남덕우 총리를 본 일이 있습니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저도 기뻤습니다. 그렇게 좋은 건강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만에 이 어찌된 일이십니까.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을 이끈 주역을 잃게 된 이 허전함을 어떻게 달래야 합니까.


총리께서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강의록으로 독학해 대학에 들어 가셨습니다. 학문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뒤늦게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온갖 고난을 겪으며 1961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되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대학교육은 매우 빈약해 부끄러운 수준에 있었습니다. 총리께서는 회고록에서 '미국에서 배운 대로 가르치겠다'고 다짐했고 배운 학생들은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았다'고 했다고 쓰셨습니다.

그 뒤 총리께서는 1970년에 '가격론'이라는 미시경제학 책을 내셨습니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현대경제이론서로는 효시였으며 그런 만큼 학계에 미친 공로가 지대했습니다. 저도 경제원론을 가르칠 때 부교재로 쓴 일이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경제학자로서 누구보다 진지하고 유능한 분이셨습니다.

총리께서는 1969년부터 10년간을 재무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로 봉직하면서 한국경제의 산업화를 이끌었습니다. 경제개발에는 자본과 기술ㆍ시장ㆍ노동력 등이 있어야 하는데 노동력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나머지 모두를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시장주의자이면서 개방론자인 총리의 학문적 소신이 적중했던 것이라 봅니다.


그때는 외자사업들이 모두 부실화해 부도위기를 맞고 있었고 오일 쇼크로 온세계가 불황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위기국면에서 총리께서는 1972년 사채동결조치, 1976년 부가가치세제의 도입, 해외건설의 적극추진 등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하여 재임 중 연 10%의 경제성장률을 이루셨고 1인당 소득을 1969년의 200달러에서 1978년의 1,000달러로 끌어올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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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재무부 장관이 되신 총리께서는 당시 한국은행 김성환 총재에게 정책수립을 실무적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고 김성환 총재는 저를 추천해 약 2년 동안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일을 했습니다. 조사부 조사역이었던 저는 장관님의 정책자료 수집, 정책안에 대한 해외사례조사, 정책 수행시 예상되는 문제점 들을 보고하는 일을 했습니다. 8ㆍ3사채동결조치가 있기 1년 전쯤 사채동결조치의 해외사례가 있는지, 만일 그러한 조치가 있다고 하면 영향이 어떠할지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연초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를 작성하기 위해 워커힐 빌라에서 총리 내외와 우리 내외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면서 밤샘작업을 했던 일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총리께서는 정부 공직자로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철저하게 합리적이며 매사에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분이셨습니다. 화를 내는 일을 본 일이 없고 큰소리 치는 것을 본일이 없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외유내강의 결단력으로 일을 추진하셨습니다. 사진에 대한 취미는 전문가의 경지였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은 젊은이들보다고 더 익숙하셨습니다.

우리경제는 영국이 200년, 미국과 일본이 150년 동안에 이룩한 산업혁명을 지난 반세기 동안에 해냈습니다. 이렇게 반전된 우리경제의 구석구석에는 남덕우 총리의 땀과 고뇌가 스며있습니다.

이만큼 경제의 압축성장을 이뤄놓으셨으니 이제 마음 놓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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