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부정책이 혼선을 빚고 있다. 어업협정, 국민연금, 의약분업, 한자병용, 정부조직개편 등을 둘러싸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정부부처간, 당정간, 두 여당간에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채 각개약진하는 상황이다. 벌써 내년 선거를 의식하는 행태까지 보임으로써 일이 더 꼬이고 있다.공공·기업·금융·노동부문의 중량급 개혁의 갈 길은 아직 멀다. 그런데 경량급정책에서부터 정부가 표류하는 모습을 보이니 개혁의 전도가 불안하다.
필자는 최근의 상황전개를 보면서「여론영합주의」가 우리 나라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이 여론영합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도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은 남미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
민주정부가 여론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주제하에서도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다. 여론을 존중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펼 수 있다. 그런데 왜 여론 영합주의니 뭐니 해괴한 말을 쓰느냐. 혹자는 이렇게 나무랄 것이다. 그러나 여론은 이런 순기능을 가지는 한편으로 치명적인 덫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여론은 조변석개하는 덧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해집단의 큰 목소리가 흔히 여론으로 둔갑한다. 따라서 현실을 중시하며 여론의 무게를 헤아리다 보면 정치논리가 발동하여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국에 의당 해야 할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현정부의 경제정책은 일찍부터 정치논리와 여론영합주의로 혼선을 빚어 왔다. 정부가 집착해 온「빅딜」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과 고통분담에 5대 재벌이 열외라는 일반여론을 업고 정치권이 한건주의로 띄운 것이 빅딜이다. 지역감정까지 포함하여 온갖 부작용이 불거지고 있는 빅딜은 기업구조조정의 아킬레스 건이다. 5대 재벌에 대해서도 6대 이하처럼 워크아웃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현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악화된 지역감정은 여론영합주의의 업보이다. 작년에 정부는 부도난 아시아 자동차를 살려 주고 기아자동차와 묶어 현대자동차가 인수하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신탁원리금을 보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금감위가 한남투자신탁에 대해 이 선언을 뒤집었다. 지지기반의 여론에 영합하는 이것들에 대해 정부는 그동안의 지역불균형성장전략때문에 광주권에 변변한 제조업체라곤 아시아자동차 뿐이라는 현실, 투자자들이 쪽박을 차면 원래 취약한 지역금융이 결딴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변명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류의 현실논리가 다른 지역경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엉뚱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삼성이 손대는 일은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어 기를 쓰고 협력업체가 되어 수십억 씩 시설투자하였는데 삼성차를 문닫게 하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이쪽 금융기관만 문닫고 이쪽 실업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지역차별 아니냐 등 등. 그러기에 원칙없는 여론영합정책은 아무리 유혹이 크더라도 처음부터 냉정하게 끊어야 한다.
어떤 정책이든 찬반과 득실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책실시의 기준은 정책의 사회적 이득과 사회적 비용을 엄밀하게 따져 보는 것이다. 사회적 이득이 사회적 비용보다 크면 그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정책실시로 손해를 보는 집단이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이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예컨대 정부가 의약분업 실시를 1년 연기하고자 한다면 1년 연기의 사회적 이득이 사회적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견실한 논리가 없이 이해집단의 반발을 두려워 하여 총선 뒤로 미룬다는 것은 얕은 여론영합주의이다.
구조개혁의 갈 길은 멀다. 구조개혁은 원래 인기없는 작업이다. 지상명제인 구조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론보다 전문가집단의 지배적 의견을 따라야 한다. 전문가집단의 지배적 의견은 설사 단기에 YS가 기록한 10%대의 인기를 하회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구조개혁의 큰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야 개혁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필사즉생의 충무공정신으로 돌파하지 않고 인기와 선거, 정권재창출 등의 잿밥에 신경 쓸 때 개혁은 사이비개혁으로 전락할 것이다. 경제는 냄비경제가 되어 일본처럼 장기불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개각을 하든 안하든 개혁의 최종책임은 DJP의 몫이다. 위기를 확실하게 극복하여 경제를 새로운 자연성장궤도로 진입시키고 제도와 관행면에서 우리 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 올려 역사에 남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개혁한다면서도 좌고우비하여 중우정치를 만개시키고,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는 우리 현실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급급할 것인가. 선택은 결국 DJP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