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돈 풀어도 안풀리는 유럽 위기 '유동성 함정'에 빠지나

ECB 자금공급에도 은행들 곳간 채우기 가능성<br>위기국 국채 매입에 안쓰일땐 신용경색 불보듯


유럽중앙은행(ECB)이 무제한 유동성 공급에 나섰지만 유럽의 재정위기를 해소하기는커녕 '유동성 함정'에 빠트려 신용경색을 부추길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럽 은행들이 ECB 대출자금으로 스페인 등 재정위기국의 국채를 매입하는 대신 자기자본 확충이나 대출금 상환 등에 이용해 자금순환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ECB가 전날 유럽 523개 은행에 4,890억유로(약 737조원)의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당초 ECB가 기대한 국채시장 안정 등의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FT에 따르면 ECB의 이번 유동성 공급은 사상최대 규모지만 이 중 신규 유동성은 1,890억유로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기존 단기대출을 장기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 신규 유동성이 고스란히 재정위기국 국채매입에 쓰일지도 의문이다. 은행들은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확산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이탈하면서 자금확보를 위해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나 우량채권까지 팔아 치우고 있는 상황이다. FT는 은행들이 ECB 대출자금을 내년 1ㆍ4분기에 만기 도래하는 2,300억유로의 부채상환에 쓸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설령 은행들이 국채매입에 나서더라도 부실국채 매입은 은행들의 자산건전성을 훼손하고 국가 위기가 민간 영역까지 확대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앞서 유럽은행감독청(EBA)은 ECB 대출로 은행들이 국채를 매입하면 부실자산이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탈리아은행업협회(ABI)는 은행들이 EBA의 권고에 따라 재정위기국 국채의 익스포저(위험노출)를 늘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스 국채에 투자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 유럽의 대형 헤지펀드가 그리스를 상대로 소송 의사를 밝힌 것도 은행들의 국채매입을 부담스럽게 한다. 스페인의 헤지펀드 베가에셋매니지먼트는 그리스가 국채의 순현재가치(NPV)의 50% 이상을 평가절하할 경우 그리스를 상대로 소송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섣불리 위험국가의 국채에 손을 댔다가는 손실이 발생해 법정다툼까지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 나아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 ECB의 대출만기 확대로 은행들의 ECB 의존도가 높아져 자립이 어려워질 것이라며 부작용을 우려했다. 프랑스 은행들의 경우 ECB로부터 들여온 자금은 지난 6월 이후 4배로 증가하는 등 ECB 자금에 중독된 것으로 나타났다. FT는 이 같은 상황을 내다보듯 19일자 사설에서 "ECB의 완화정책이 유동성 함정을 만들어 신용경색을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유동성이 은행들의 내부에 쌓이기만 할 뿐 시중으로 흘러 경제성장에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를 반영해 21일 유럽증시와 국채시장은 ECB 유동성 공급 방침에도 불구하고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전날 5.03%까지 하락했다가 이날 5.234%로 급등했고 이탈리아 국채금리도 6.57%에서 6.745%로 뛰었다. 또 유럽 국가들의 경제지표가 부정적으로 나오고 국제신용평가사 등 외부 기관들이 유럽에 대한 혹평을 쏟아내며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21일 이탈리아의 3ㆍ4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분기 대비 0.2% 감소해 2009년 4ㆍ4분기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헝가리의 신용등급을 기존의 'BBB-'에서 투기등급인 'BB+'로 낮췄다. 앞서 현재 'AAA'로 최고등급인 프랑스 국가신용등급의 강등 가능성을 제기한 S&P는 21일 프랑스의 신용등급 강등시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가용재원이 급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이날 "유럽연합(EU)이 지난 1년을 허송세월하면서 유로 위기를 악화시켰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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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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