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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이 31일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을 전격 결정한 것은 단순한 사업재편을 넘어 3세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다목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물론 삼성 측은 "이번 합병은 계열사 간 중복·유사 사업을 통합하고 미래 성장동력이 될 사업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부터 제일모직의 패션 사업을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하고 삼성SDS와 삼성SNS를 합병하는 등 굵직한 사업재편 작업을 잇따라 벌여왔다. 지난해 삼성에버랜드가 건물관리 사업을 에스원에 넘기고 급식 사업을 삼성웰스토리로 분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삼성코니정밀소재는 대주주인 삼성디스플레이가 보유지분 전량을 미국 코닝에 넘기면서 삼성의 품에서 떨어져나오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한 듯했던 삼성의 사업재편은 이번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 결정으로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특히 재계는 이 같은 사업재편이 오너 3세들의 경영권 승계와 이를 위한 사업영역 조정의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성 3세 후계구도 밑그림 구체화=이번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은 제일모직이 지난해 12월1일부로 패션 사업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긴 데 이은 후속조치다. 당시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삼성에버랜드 패션 부문 경영기획담당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자신의 전공인 패션 사업을 계속 맡게 됐다. 이후 업계의 관심은 제일모직의 남은 소재·화학 사업을 3세 중 누가 맡을지에 집중됐다. 특히 소재 사업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쟁력 확보를 지속적으로 주문하면서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려는 부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합병으로 제일모직의 주력 사업이었던 소재 사업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챙기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된 셈이다. 제일모직이 이 부회장이 총괄하는 전자 계열사인 삼성SDI에 흡수합병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삼성SDI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아울러 제일모직(소재)-삼성SDI·삼성전기(부품)-삼성전자(완제품)로 이어지는 삼성의 전자 수직계열화도 완성되게 됐다.
재계에서는 삼성 3세 중 이 회장의 외아들인 이 부회장이 전자·금융 계열사를 맡고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사장이 호텔·건설·중화학을, 차녀인 이서현 제일기획·삼성에버랜드 사장이 패션·미디어 부문을 각각 맡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배구조 변화도 주목=이번 합병은 제일모직의 불안정한 지배구조 문제를 해소한다는 의미도 있다. 현재 제일모직의 최대주주는 지분 11.6%를 보유한 국민연금이며 2대주주는 한국투자신탁운용(7.3%)이다. 삼성 계열사가 보유한 지분은 삼성카드 7.3%, 삼성자산운용 4% 등에 불과했다. 하지만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이 성사되면 합병회사의 최대주주는 지분 13.5%를 보유한 삼성전자가 되며 국민연금은 10.5%의 지분으로 2대주주가 된다.
이와 함께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삼성에버랜드가 합병으로 없어지는 '제일모직' 사명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주목된다.
삼성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모태기업 중 하나인 제일모직 상호가 합병으로 없어지면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의 한 관계자는 "현재 에버랜드 매출에서 패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데다 그룹 모태기업이라는 상징성과 삼성 창업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에버랜드는 삼성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을 뿐 아니라 이재용 부회장이 지분 25.1%,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이 각각 8.3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등 후계구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회사다. 이번에 사명마저 삼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제일모직으로 변경할 경우 삼성그룹 내에서 삼성에버랜드의 역할은 한층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회장 귀국과 맞물려 사업재편 가속 전망도=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은 이 회장이 올 들어 강조하고 있는 '한계 돌파' 및 '마하경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마하경영은 초일류 기업으로 지속 생존하기 위해 회사의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 합병 역시 삼성이 강점을 지닌 완제품·부품과 달리 취약 분야로 꼽히는 소재 부문을 집중 육성해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더구나 삼성은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 시장이 성장 정체기에 접어들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현재 일본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의 귀국이 임박한 것으로 관측되면서 '한계 돌파'를 위한 삼성의 사업재편 후속조치도 다시금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다음 사업재편에 나설 분야로 건설·화학·금융 등의 분야를 꼽고 있다. 건설의 경우 삼성물산이 지난해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7.81%까지 늘리며 합병설에 불을 지폈고 이번 합병을 계기로 제일모직이 보유한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삼성물산에 매각할 가능성이 증권업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고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화학 계열사들도 이부진 사장이 최대주주인 삼성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통합 가능성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