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째 장기간 저금리가 이어지자 기업과 가계는 가랑비에 옷 젖듯 빚에 내성을 갖게 됐다. 경쟁력의 한계점에 이른 기업들마저 퇴출되지 않고 저금리에 기대어 '좀비'처럼 버티고 있다. 심지어 중견ㆍ중소기업의 미흡한 국제 경쟁력은 만성적 저금리가 연출한 구조조정 지연의 결과라는 다소 비판적인 색채의 분석도 나온다.
가계 역시 저금리의 유혹에 빠져 빚 무서운 줄 모르게 됐다. 거치식 대출로 이자만 내가며 빚 상환을 연기하는 사이에 처음엔 푼돈 수준이던 이자가 장기간 쌓여 목돈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저금리 기조가 지나치게 만성화하면서 경기부양 효과보다 경제성장의 잠재력이 침식당하는 부작용이 더 부각되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미 우리 기업과 가계가 이자의 무서움을 모르는 금리불감증에 빠졌다고 경고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신(新)저금리' 국면은 한편으로 볼 때 우리 경제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리가 낮을 때 기업들의 옥석을 과감하게 가리고 가계 부문도 체력을 보충할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기회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줄기에서 최근 금융당국이 무조건적으로 대선 이후로 미루고 있는 부실 처리를 가급적 지양하고 최소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원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유동성 먹고사는 '좀비기업'만 는다=금융비용의 감소는 오히려 한계기업의 수명만 늘리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부실채권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줄다 보니 부실채권 정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구조조정이 지연되며 시중은행의 부실채권은 증가 추세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시중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은 1.49%로 집계됐다. 신규 부실채권은 상반기에만 12조3,000억원 발행, 전년 동기(11조7,000억원)보다 더 늘었다. 문제는 올 하반기에 나올 부실채권 규모도 작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시중에 돈이 많아도 기업투자와 구조조정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걸림돌인 '좀비기업'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중경 한국개발경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최근 대한상의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좀비기업 증가가 일본과 같은 장기 경기불황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좀비기업이 2003년 11%에서 2010년 19%로 급증했다"며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기업에 대한 신용보증을 유망 창업기업으로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역시 일본의 예를 들어 저금리에 대한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삼성연은 '저금리와 구조조정'이라는 보고서에서 "일본의 구조조정 부진이 경기침체ㆍ부실심화와 상호작용하면서 기업 및 경제 전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심화시켰고 이는 소비와 투자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한계기업이 도태되지 않고 잔존하면서 과당경쟁과 가격인하로 건전한 기업의 시장을 잠식, 건전한 기업마저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떠도는 돈에 불확실성만 가중=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업투자가 관건이지만 기업들은 불투명한 경기전망에 투자를 최대한 미루고 있다. 상식대로라면 저금리 기조가 이어질 경우 외부 자금조달 여건이 나아지면서 투자가 늘어야 하는데 이 공식이 먹혀 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ㆍ4분기 설비투자는 전기 대비 6.4% 감소했다. 기업들의 투자심리도 9월 현재 93에 불과, 3개월 연속 하락하며 하반기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국내기업의 설비투자는 외국과 비교해도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1인당 국민소득(GNI)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늘어난 기간에 우리나라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6.7%로 미국(8.5%), 영국(7.4%) 등은 물론 일본(7.4%)보다도 저조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경기회복과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해서는 투자확대가 반드시 필요한데 최근 들어 설비투자 동력이 과거에 비해서는 물론 주요국보다도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책도 저금리 패러다임 맞춰 전환해야=최근 정부가 경기를 살리기 위해 내놓는 정책들이 한계에 부딪치는 것도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상 초유의 저금리 경제에 맞춰 긴 호흡의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 이후로 주요 정책결정을 미루고 3개월, 6개월짜리 대책만 양산하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정치권이 표를 인식해 앞다퉈 내놓는 각종 포퓰리즘식 정책들은 시장 혼란만 가중한다.
경제전문가들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감안해 저금리 정책이 경기조절 기능을 갖도록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경제활동이 금리에 민감해진 만큼 가계부채ㆍ소비ㆍ설비투자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한편 금리정책의 완급도 좀 더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 역시 저금리 기조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채구조를 개선하는 한편 투자와 사업구조 재편을 좀 더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저금리 기조라고 하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며 "정부가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강력한 유인책을 동원해서라도 기업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