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11월의 호국인물 임상택 육군소령

/=연합뉴스

전쟁기념관은 수류탄을 몸으로 감싸 수많은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전사한 임상택(1939.6∼1968.11) 육군소령을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임 소령은 1961년 5월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같은 해 11월 갑종간부 제157기로 임관했다. 이후 제9사단 30연대 8중대 소대장, 30연대 5중대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에는 백마부대 전투 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월맹 정규군 7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고, 귀국 후에는 제3사단(백골부대)에 배속돼 휴전선에 침투한 무장간첩 2명을 사살했다.

임 소령은 대침투작전에 대비한 방책선 보강작업 임무를 부여받고 1968년 11월 중대원 10명과 함께 부비트랩 설치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작업 도중 중대원 1명이 폐 철조망을 끌고 내려오다가 실수로 부비트랩에 설치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이에 임 소령은 수류탄을 뽑아 던지려고 했으나 수류탄이 말뚝에 매여 있자 몸으로 덮치고 장렬히 산화했다.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당시 함께 있던 10명의 부하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1월의 6·25전쟁영웅’ 강길영 해병중위

국가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해병 제1연대 소속으로 강원도 양구의 924고지 전투에 참가해 전사한 강길영 해병중위를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31일 선정했다.

강 중위는 1949년 4월 해병대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수도 서울 탈환작전 등에 소총병으로 참여했다. 이후 해병 간부후보생 제3기로 종합학교에 입교해 군사훈련을 받고 1951년 소위로 임관해 가리산·화천지구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양구의 924고지(일명 김일성 고지) 탈환에 나선 해병 1연대 제11중대는 적진 100m 전방까지 돌격했다. 마지막 최후의 진격을 앞두고 중대장 육동욱 중위가 적탄에 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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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중대 선임장교인 강 중위는 “김일성 고지는 우리가 꼭 점령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선두에 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어 1953년 일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11월의 독립운동가’ 이경채 선생

국가보훈처는 일제시대 항일투쟁을 전개한 이경채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0년 4월 광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에 격분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하던 시기인 1924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28년 선생은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한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광주 송정리역 등에 게시하다 불온 문서 제작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선생의 퇴학 처분으로 촉발된 동맹휴학이 광주고등보통학교 뿐 아니라 인근 학교로까지 확대되자 동맹휴학은 식민지 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31년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했으나 임시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933년 상해로 망명해 윤봉길 의거 이후 강제 휴교된 인성학교를 다시 개교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1934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이동해 한국독립당 기관지인 ‘진광’ 간행에 참여하던 중 일제에 의해 기관지 발행이 어렵게 되자 상해로 다시 건너가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직할의 일본연구소에 재직했다.

선생은 1936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한 후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항일전투에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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