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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포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이던 김구는 1898년 인천감리영을 탈옥한다. 이후 백범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재령에 '보강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받았는데 유난히 총명한 눈빛의 11세 소년이 눈에 띄었다. 김구에게 한문을 배우던 이 소년은 훗날 미두로 큰돈을 벌어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설립한 강익하다.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모의로 김구가 구속되자 강익하는 경성법학전문(현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해주지방법원 판임관으로 근무하던 1919년, 3·1운동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을 때였다. 황해도 연안 출신의 경성여고보생 한 명이 검사정의 질문에 불리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강익하는 재판에 유리하게 통역을 해줘 이 소녀가 풀려나도록 했다. 이때부터 강익하는 이 소녀가 중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귀국해 이화여전에 입학한 후에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8년 동안의 집념에 감동한 이 소녀는 결국 결혼을 승낙하고 1928년 자신이 설립한 화광유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소녀는 바로 이승만에게 이화장을 제공하고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휘경학원 설립자 황온순이다.
3·1운동 얼마 후 강익하는 돌연 법조계를 떠나 인천 미두장에 뛰어들었다. 중매점을 개업해 큰돈을 벌었으며 1927년에는 '서선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상무취체역으로 부임했다. 1932년 조선취인소가 출범하자 인천에는 강익하상점을, 경성에는 금익증권을 개점했다. 강익하는 '기정미총람'과 '익정보'를 발간하며 일본인 미두업자에 비해 한발 앞선 정보력과 영업력을 보였다. 미두와 주식으로 큰돈을 번 강익하는 수해 때마다 기부자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등 학교와 사회에 기부도 많이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강익하는 '3·1동지회'를 결성하고 귀국한 김구를 보필했다. 상공회의소 부의장 시절에는 이승만에게 5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김구에게도 300만원을 제의하기도 했다. 강익하는 홍콩에서 뷰익48년형을 구입해 백범의 업무용 차량으로 제공하는 한편 홍콩에서 백범일지의 인쇄용지도 구입해줬다. 김구 사망 후에는 장례위원을 맡아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미두재벌 강익하는 1946년 최초의 민간보험사인 대한생명을 설립하고 최대주주 겸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사명은 3·1운동 당시의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리고 '대한생명'으로 지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정부수립은 물론 보험 등 경제계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증권시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김구의 제자 강익하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