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禹錫(삼성경제연구소 소장)지지난주 일요일 운동을 갔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골프장이라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안개가 심하면 티 오프를 늦추는게 보통인데 이 골프장은 시간대로 출발시킨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진행계는 무전기를 들고 앞 팀과 연락을 하면서 그냥 치고 나가란다. 나가서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개 방향을 짐작만 하고 칠 수밖에 없다. 『그린에 사람 있어요』하고 고함을 질러 대답이 없으면 그냥 친다. 치고 한참 있다가 『아직 치지 마세요』하고 고함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홀들이 붙어 있어 사방에 고함소리다. 골프공이란 것이 매우 위험한 것인데 모두들 고함을 질러 가며 그야말로 스릴있게 운동을 계속한다.
전반홀을 다 돌고 10시가 넘어도 여전히 앞이 안 보인다. 전반이 끝난후 진행보는 사람보고 『9홀만 돌면 값을 깍아 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단다. 처음부터 안 쳐야지 일단 한 홀이라도 쳤으면 18홀 값을 다 내야 하는게 규칙이란다.
『이렇게 안개가 안 걷히면 골프장에서 뭔가 조처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고 했더니 『처음 안개 상태를 보아 치고 안치고는 플레이어가 판단할 일』이라고 간단히 응수했다. 역시 각자가 판단해서 책임을 지는 시장경제원칙이 안개 낀 골프장까지 침투했구나 하고 감탄했다.
같은 돈이니 일행들은 그냥 치잔다. 아마도 그날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오전 내내 짙은 안개 속에서 위험한 난타전들이 강행되었다. 사실 몇번 다른 홀에서 공이 날아 오기도 했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골프장의 책임도 간단치 않을텐데 그걸 강행시키는 대담성과 사고가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선견성이 놀랍다. 과연 그날 사고가 났다는 소리는 없었다.
아직 골프장은 셀러스 마켓(SELLER'S MARKET)이니 모처럼 기회를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하여 플레이어들은 군소리없이 운동을 계속했다. 12시가 넘어서 마지막 홀 그린에 와서야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골짜기엔 안개가 자욱하다.
18홀을 안개 속에서 헤매고 나니 꼭 IMF사태를 맞은 요즘 기업인들이 이런 심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은 안보이니 대개 방향만 짐작하고 기업경영을 할 수 밖에 없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욕심을 안 부리게 된다는 점이다. 고개도 안들고 힘도 안넣고 치니 골프 스코어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평소 비거리가 짧고 산으로 잘 헤매 항상 꼴찌를 하던 J씨의 스코어가 제일 좋았다. 모두들 「안개체질」이라고 놀렸더니 『앞이 안보일 땐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이기는 법』이란 자평을 했다. 기업인들도 IMF 안개가 짙을 땐 기본을 지키면 기업경영이 더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