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기업과 금융인들에게 파생금융상품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파생상품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잘못 건드려 손해가 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굴지의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파생상품을 잘못 운용하다가 파산한 경험도 있어 이 분야에 미숙한 한국 금융산업에 파생상품이 버거웠던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9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파생금융상품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금리ㆍ환율ㆍ주가 등 각종 시장 지수들이 급변동하는 추세에 비춰 국내 금융기관도 파생상품 시장을 새 수익원으로 발굴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주택담보대출 등 소비자금융 부문에 주력하고 시중에 부동자금이 넘쳐나는 현재 금융시스템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파생상품 등 선진금융 부문을 집중 육성하는 금융시스템 리모델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전체 파생거래 규모는 무려 2경2,756조원으로 정부예산의 20배가 넘고 국내총생산(GDP)의 4배 수준에 이를 정도로 급팽창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환율변동을 경험한 기업들은 파생상품거래를 통해 환율 변동위험을 관리하고 있으며 개인들도 주가연계증권ㆍ환율연동부예금ㆍ파생상품펀드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등 일부 금융전문가들의 영역으로만 비쳐지던 파생상품이 일상에 깊숙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금융기관 중 파생상품 거래의 선두주자는 90년대 초반부터 국내 최초로 파생상품을 취급해온 산업은행. 100조원 이상의 대규모 파생상품을 거래하는 산업은행은 원화 파생상품을 다양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윤만호 금융공학실장은 “파생상품에 대한 수요가 기업은 물론 개인 금융자산가 등으로 대폭 확대되면서 은행들의 다양한 상품개발 능력이 필요해졌다”며 “원화 파생상품을 다양하게 만들어 수요자들의 요구를 맞출 방침”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은행이 토종은행보다 파생상품 거래에 더 적극적이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이 제일은행을 인수하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파생상품 관련부서 신설이었다. SCB는 제일은행 내에 글로벌마켓 그룹을 신설하고 자금부ㆍ외환증권시장 등을 통합해 70여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딜링룸을 설립, 외국환거래 및 파생상품 투자 등을 강화하고 있다. 글로벌금융기관의 장점을 살려 알루미늄과 구리에 각각 40%, 금과 원유에도 각각 10%씩 투자하는 원자재 파생상품펀드를 개발해 국내 은행들을 자극했다. 한국씨티은행의 경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헤지펀드 지수와 연계된 사실상 국내 최초의 헤지펀드 관련 펀드를 출시했다. 이후 우리은행이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연계상품을 내놓는 등 국내 금융상품 가운데 파생상품이 기존 주식연계 수준에서 벗어나 다양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올해 자금시장그룹 파생상품사업단을 신설하는 등 파생금융상품 분야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황민택 파생상품사업단 차장은 “과거에는 외국계 금융기관의 파생상품 구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면서 “호주 매쿼리은행 등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파생상품 개발에 노력 중이며 연내에 국내 최초로 파생금융상품 트레이딩 시스템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쿼리은행과 제휴한 우리은행도 트레이딩 시스템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3년째 제휴하고 있으며 지난해 주식관련 파생상품 시장의 점유율이 10%(1조7,000억원)대로 올라섰다. 우리은행 파생금융팀은 매쿼리은행 직원들로부터 금융기술을 익혀 연내 파생상품 시스템 인수를 마무리할 방침이다. 파생상품은 기존의 예금ㆍ대출상품과 달리 복잡한 수학논리에다 수익률 등 경제ㆍ경영학적 요소가 첨부되는 복합금융상품이다. 따라서 상품설계능력이 그 어느 분야보다도 중요하며 시중은행이 새 수익원으로 파생상품 시장에 뛰어들려면 우선 전문인력을 늘려야 한다. 반기로 한국인프라운용 대표는 “파생상품을 폐쇄적인 일부 고급인력들의 대상으로 놔두기에는 이미 금융시스템이 변했다”며 “한국이 금융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제시스템이라는 낙후된 파생상품 인력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