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롯데백화점 평촌점에서 열린 롯데그룹 사장단회의. 이날 국내외 48개 계열사 대표와 그룹 고위임원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신동빈(사진) 롯데그룹 회장은 전사적인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했다. 유럽발 재정위기의 확산으로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만큼 강도 높은 비상경영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판단에서다.
이날 신 회장은 “지난 몇 년간 롯데는 국내외 대형 인수합병(M&A)을 바탕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지만 지금은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이처럼 불확실한 시대에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라고 경고했다. 아울러 주요 프로젝트 추진 시 정확한 투자심사분석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실상 당분간 M&A 추진은 자제하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난 4일 롯데쇼핑은 하이마트 인수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지난달 20일 롯데를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던 MBK파트너스와의 협상이 결렬된 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결정이었다. 더욱이 일주일 전 전사적인 비상경영을 외치며 신중한 M&A 전략을 주문하던 신 회장의 발언을 감안하면 깜짝 반전이었다.
롯데그룹이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하이마트를 품에 안는데 성공하면서 신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또 다시 재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 동안 굵직굵직한 M&A를 잇따라 성공시키며 그룹의 비약적인 성장과 체질 개선을 이끌어낸 전략가다운 면모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됐다는 평가다.
특히 신 회장은 하이마트 인수를 앞두고 위기경영을 강조함으로써 인수 포기 의사를 내비쳤지만 물밑에서는 발 빠르게 인수를 추진하는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식 전략을 활용했다. 실제로 지난달 신 회장의 발언 이후 M&A업계에서는 롯데그룹이 향후 기업 인수경쟁에 소극적으로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을 깨고 롯데가 하이마트의 새 주인으로 낙점되면서 역시 ‘M&A 시장의 큰 손’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입증하게 됐다. 특히 신 회장은 그룹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기업이라면 ‘재수’를 해서라도 반드시 인수한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유통업계에서는 롯데가 보유중인 백화점과 마트ㆍ슈퍼마켓ㆍ편의점ㆍ홈쇼핑 등 다양한 유통채널과 가전 양판점을 결합하는 형태로 활용할 경우 시너지 극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증권가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정연우 대신증권 연구원은 “인수금액 등이 확실해져야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당초 알려진 인수금액(1조5,000억~2조원)보다 낮은 가격에 인수했다면 인수비용에 따른 이자비용도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며 “이 경우 롯데쇼핑은 하이마트 인수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 규모가 이자비용을 상회하면서 주당순이익(EPS) 증가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2월 신 회장이 그룹 회장에 부임한 이후 롯데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빨라진 의사결정시스템이다. 그 동안 롯데는 꼼꼼하고 신중한 조직문화 때문에 항상 경쟁사들보다 의사결정이 한 발 뒤쳐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게 사실이다. 2009년 유통업계의 맞수인 신세계에게 파주 아울렛 부지를 빼앗긴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신 회장은 부임 직후인 지난해 3월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조직으로 바꾸라”는 특명과 함께 40년간 유지해오던 직급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직급체계가 단순화되면서 그룹 내 의사결정 구조도 한층 빨라졌다. 보수적인 경영기조를 이어오던 롯데가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인 6조7,300억원의 투자를 발표하며 공격경영으로 돌아선 것 역시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롯데의 한 고위임원은 “신 회장이 부임한 이후 전반적인 그룹 분위기가 전과 달리 ‘스피드’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라며 “특히 M&A 과정에서 시너지 효과 등을 고려한 뒤 되도록 뜸을 들이지 않고 신속하게 결정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