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책과 세상] 역사·자연·사람을 잘 녹여낸 김훈의 신작

■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역사소설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소설가 김훈의 신작은 서정적인 제목의 현대물인 동시에 젊은 여성이 주인공(화자)이다. 소설 속 '나'는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에서 식물의 세밀화를 그리는 계약직 공무원인 화가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지만 지방 공무원 출신인 아버지는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수감됐다 가석방돼 삶이 남루할 뿐이다. 전방에서 꽃과 나무가 철 따라 바뀌는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하니 사진이 잡아낼 수 없는 생명성을 담는 게 임무다. 수목원에서 만난 김민수 중위는 '전사자 유해발굴단'에 전출돼 '나'에게 발굴된 뼈를 그리는 업무를 맡긴다. 유해 발굴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담는 게 임무다. 이 속에서 '나'는 꽃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생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목격한다. 굵직한 사건이 짜임새 있게 전개되는 류의 소설이 아닌 대신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삶의 장면들이 스냅 사진처럼 보여진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구조적인 이야기를 가진 건 아니기에 억지로 서사구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저자는 "시대와 역사의 고통과 아주 아름다운 자연, 그 사이에 끼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인간의 가엾은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인상적인, 그러나 무척이나 가엾은 존재로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데려온 늙은 수컷말 '좆내논'이 등장한다. 죽기 두어달 전 한길에서 마지막 발정을 일으켜 그런 별명이 붙었는데 발작하듯 목 끈을 끊고 달아나 강가에서 사살됐다. 훗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좆내논의 등에 엎드려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 수컷의 허세, 남성의 허위를 작가는 그렇게 은유했다. 작가는 이번 소설을 위해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초여름까지 휴전선 이남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듯 돌았고 그 안에서 본 세상과 자연, 사람의 풍경을 글로 재구성했다. 그 시간 속에 녹여낸 강한 사유의 힘이 자연과 인간, 전쟁과 현대화 등을 찰지게 버무려 놓았다.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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