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전 장관은 13일(현지시간) 뉴욕주에 위치한 리버럴뉴스쿨 연설에서 "성장과 공정경제를 (동시에) 이뤄야 하며 어느 하나만 가질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15년간 주택 비용, 학자금, 의료비는 급등한 반면 미국인 대다수의 소득은 정체돼 있다"며 "힘든 노동에 종사하는 미국인이 중산층이 될 수 있도록 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2년 한국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민주화' 공약과 비슷한 주장을 한 셈이다. 클린턴 전 장관이 4월 대권 도전 선언 이래 포괄적 경제 어젠다를 밝히기는 처음이다.
이날 연설 내용은 클린턴 전 장관의 중도성향에 비하면 약간 '좌클릭'에 가까웠다. 소득격차 심화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최근 뉴욕타임스(NYT)와 CBS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부의 분배를 요구하는 미국인들의 비율은 3분의2에 달했다. NYT에 따르면 클린턴 전 장관은 연설 막판까지 고민하다 정치 자금줄인 월가 은행들과 대기업·부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적어 넣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들은 사상 최고치에 근접한 대기업들의 이익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노사의 이익 공유를 주장했다. 특히 그는 젭 부시 전 플로리다주지사 등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 3명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들의 트리클다운(낙수효과) 정책은 감세로 상위 부자들에게 더 많은 부를 주는 것이며 대기업들을 위한 것"이라며 맹공을 가했다. 그는 부시 전 주지사가 "미국인들은 더 많은 근로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데 대해 "그는 종일 서서 일하는 간호사와 교사들, 밤새 운전하는 트럭 운전사를 만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고 비판했다. 스콧 워커 위스콘신주지사에 대해서도 "공화당 주지사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아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며 "이는 비열하고 엉뚱한 것"이라고 공세를 이어갔다.
그는 월가 금융기관에 대해 "사기와 환율조작 같은 범죄행위는 정당화하거나 인내할 수 없다"며 금융규제를 위해 2010년 제정된 도드프랭크법을 더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헤지펀드와 초단타거래, 비은행 기관 등 이른바 '그림자은행'에 대한 강력한 규제도 시사했다.
로이터통신은 "클린턴 전 장관이 노동자 보호와 월가 금융 규제, 법인세제 개혁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의지를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미 언론은 앞으로 클린턴 전 장관이 최저임금 인상과 취학 전 아동의 보편교육, 소득재분배를 위한 자본이득세 도입 등을 구체화하며 힐러리노믹스의 내용을 채워갈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클린턴 전 장관이 월가와 대기업들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익을 근로자들과 공유하는 기업들에 여러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밝힌 것이 단적인 사례다. 또 은퇴 프로그램 강화를 약속했지만 전 국민 의료보험 같은 대대적인 사회안전망은 도입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월가에 대해서도 장기투자자의 자본이득세를 경감하겠다고 밝히는 등 당근을 제시했다. 또 상업은행이 투자활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글래스스티컬 법을 부활시킬 계획도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이를테면 자칭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버몬트주 상원의원에게 열광하는 민주당 좌파를 끌어안으면서 중도 세력의 지지 기반도 유지하는 실용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민주당 내 싱크탱크 '제3의 길'의 조너선 카원 대표는 "힐러리 전 장관이 포퓰리즘을 기술적으로 피하면서 각각 성장과 공정경제를 주장하는 당내 세력을 통합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