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작업 뒤늦은 출발 불구 속전속결/미 AT&T GIS 비메모리 사업부 인수지난 94년 11월 어느날 밤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적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AT&T GIS본사.
넓은 회의실에는 현대전자와 AT&T사의 중역진이 마주 앉아 AT&T가 매각을 추진하는 비메모리 사업부문(MPD)을 인수하기 위한 막바지 절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날 아침부터 시작된 협상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매각대금과 지불조건, 종업원 대우 등의 중요한 문제는 모두 타결됐지만 특허 등 지적재산권의 처리를 두고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시간이 흘러 새날이 밝았다.
AT&T측에서는 지적재산권 일부를 현대에 넘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AT&T가 소유하되 사용권은 확실히 보장하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현대측 협상대표인 김영환 현대전자 사장(당시 전무)은 잠깐 휴회를 요청하고 서울에 있는 정몽헌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OK』. 정 회장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에따라 현대는 세계적인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를 거머쥐게 됐으며 메모리 사업을 발판으로 비메모리 분야로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를 마련했다. AT&T GIS의 인수금액은 3억4천만달러. 이는 당시 우리기업의 해외 단독투자 규모로는 최대였다.
현대가 이의 인수를 검토한 것은 협상타결 4개월 전인 94년 9월. 당시 AT&T사는 멀티미디어 사업 강화를 위해 경영상태가 좋은 비메모리 사업부를 매각키로 결정하고 94년 7월 세계 유수 반도체 메이커에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초청대상에는 국내의 삼성전자는 포함돼 있었지만 현대전자는 빠져 있었다.
이 사실을 두달 가까이 늦게 현대전자 미주 본사팀의 보고를 받고 알게된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적극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지시는 그렇게 했지만 정 회장으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94년 매출액 4억4천만달러, 순이익 2천4백만달러를 예상하고 있는 대기업을 인수하는데는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고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자칫 잘 못하면 메모리 분야에서 그동안 투자했던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정 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일주일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정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진정한 반도체 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이 길밖에 없다는 의지를 굳힌 것이었다. 세계적인 반도체 메이커라는 목표를 설정한 현대로서는 비메모리 분야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후발주자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유수의 외국기업을 인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정 회장은 인수팀 대표인 김사장을 다시 불러 특명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각대금을 제외한 나머지 사안은 모두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현대 특유의 현장중시 경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현대는 유수의 업체들을 물리치고 인수에 성공했다.
뒤늦게 인수경쟁에 참여한 현대가 인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민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