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노동 정책이 노조 편향적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 정책이나 법이 일선 현장에서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건, 노조건 잘못하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법치주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국내 기업의 해외 이탈은 막을 방법이 없다”(국내 자동차 관련 회사 사장)
한국의 노사관계가 투쟁 위주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노조는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안 된다`는 일부 고용주의 잘못된 태도와 `경영진과 싸워야 정통성을 인정 받는다`는 노조의 시대착오적 인식이 꼽힌다.
하지만 일부 노동현장이 무법 천지로 치닫는 것은 각종 불법 행위에 대해 어정쩡한 타협을 강요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원칙한 대응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불법파업→폭력 행위→공권력 투입 시사 등 정부 엄포→노사 극한 대치→정부ㆍ정치권의 화해 종용→ 징계ㆍ고소ㆍ고발 취하` 등의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너진 법치주의 = 지난 2001년 민주노총의 민중대회 도중 정선모 서울 동대문 경찰서장이 민주노총 관계자가 잡아 당기는 바람에 넘어져, 뇌진탕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공권력이 노동 현장에서 짓밟히고 있는 극명한 사례다.
정부는 노사 분규 때마다 `준법 투쟁 허용ㆍ불법 파업 엄단`을 외쳐왔다. 하지만 불법파업 발생 건수는 지난 97년 17건에서 98년 55건으로 뛰어오른 뒤 99년 95건, 2000년 67건, 2001년 55건 등으로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불법파업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는 정부가 불법 파업 때마다 `주동자 구속` 등을 외치다가도 파업이 끝나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권은 회사측에 고소ㆍ고발 취하 등 받아들이기 힘든 `밀실 타협`을 종용, 노사 자율 교섭을 가로막아 왔다.
지난해말 민주노총의 연대파업과 공무원노조의 연가 투쟁이 대표적인 사례. 총 1,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 연대 파업에 대해 정부는 `강력 대응`을 공언했으나,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공무원 징계도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반발에 밀려 제자리 걸음을 거듭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조종사 노조 파업, 발전설비 등 공공부문 민영화 과정에서도 똑 같은 전철을 밟았다.
정부의 이 같은 미봉책 때문에 화염병 투척시위, 생산시설 점거, 인신폭력 등을 막아야 할 일선 공권력이 무력화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법정관리가 진행 중인 오리온전기에서 노조원들이 사장을 들쳐 메고 정문에다 팽개치고, 공장 라인을 가동중이던 사무직들을 쇠파이프로 쫓아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관할 경찰서는 대책없이 바라만 보았다. 지난 2001년 대우자동차 파업 때 과잉진압 논란으로 부평 경찰서장이 직위해제됐던 악몽이 재현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승길 한국경총 노동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불법파업으로 사용자는 매출 손실 등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어야 하는 반면 근로자는 파업 기간 임금까지 보전받고 있다”며 “이처럼 원칙을 어긴 선례들이 노사관계 안정의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최소한의 금도조차 없다 = 지난해 초 서울 힐튼 호텔에서는 GM대우차(옛 대우자동차)의 `L6 매그너스` 신차 발표회가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사스러워야 할 자리는 대우자동차판매 노조원들이 구호를 외치며 진입을 시도하는 바람에 `파장` 분위기가 됐다. 당시 워크아웃 상태였던 대우자판은 능력급제 도입을 둘러싸고 노사간 극단적인 갈등을 빚고 있었다. 문제는 투쟁의 장소를 과거 계열사의 신차 발표회장으로 삼았다는 점. 즉 다른 회사 잔치의 훼방을 경영진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인신 폭행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00년 말 건강보험공단의 파업 농성 때 노조위원장은 이사장의 뺨을 때린 뒤 형광등을 깨고 어둠 속에서 시너라며 물을 끼얹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말 조흥은행의 노조 간부도 매각 관련 실사 자료의 반환 문제를 놓고 한 임원을 폭행하고 사무실 집기를 파손하는 행패를 부렸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기아자동차의 노조 홈페이지는 온갖 욕설로 도배가 된 적이 있다. 한 고객이 노조 파업으로 차량을 빨리 인도받지 못하게 됐다며 `국민 세금으로 살려 놓았더니 파업으로 보답하느냐`라는 항의성 글을 올린 게 발단. 이후 노조원들로부터 `자전거를 타거나 대우차를 사라`, `차 빨리 인도 받아서 X폼 잡고 싶냐`, `어떤 놈이 고객은 왕이라고 했냐` 등 인신모욕성 글이 줄지어 올라왔다.
◇경영자의 인식변화도 시급=이처럼 한국의 노사 관계가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데는 회사측의 잘못도 크다. 일부 경영진은 `노조는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을 못 버린 채 아직도 구사대 동원, 노조위원장 해고 등 불법행위를 일삼고 있다. 게다가 노조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들도 많다.
깅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선진 노사 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노동자를 협상 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덕 한국노동연구원장은 “사용자의 경영정보 미공개와 권위적인 경영이 노사관계를 갈등 대립국면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며 “투명경영과 근로자를 참여시키는 경영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노둥부 발간 `우리회사 망했어요`가 주는 교훈`노사분규는 공멸의 길 상호신뢰는 공존의 길
D정보통신업체는 2000년만 하더라도 S전자에 휴대폰 충전기를 납품하고 있던 유망한 중소 제조업체였다. 매년 20여억원의 순이익을 내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노사 관계를 원만하게 풀지 못하면서 파국이 다가왔다.
회사측이 서울사무소와 천안 공장을 통합하자, 구조조정 위협을 느낀 차장ㆍ팀장 등 중간 관리자들이 `위로부터` 노조 결성에 들어갔다. `생존권`이 아닌 `내자리 지키기 차원`이라는 생각에 배신감을 느낀 창업주가 노조 결성의 주역을 해고하자 일은 더 꼬였다. 노조는 잔업거부 투쟁을 벌었고, 모 기업인 S전자는 노사합의서 작성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S전자는 2001년 2월 주문을 중단했고, 회사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지난해 노동부가 발간한 `우리 회사, 결국 망했어요- 추락한 노사이야기 10선`은 노사 분규로 공멸의 길을 걷게 된 안타까운 사례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역설적으로 노사 모두에게 대부분의 갈등 원인은 노사간 불신과 혐오감 때문이며, 해결책도 상호신뢰 확보 뿐이라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불투명한 경영이 파국 이끌었다 = 대구에 소재한 S물산은 95년 이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었고 있었다. 이 와중에 인근 P회사를 인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때부터 근로자들은 `어렵다`는 사용자의 호소를 믿을 수 없었다. 임금 체불에 대한 근로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회사는 고작 10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문을 닫았다. 소문은 사실과 달랐다. 하지만 회사의 불투명한 경영이 이를 자초한 셈이었다.
◇노사 자존심 대결로 문닫아 = 충남 아산에 소재한 I금속 아산 공장은 외환 위기 이후 임금동결, 상여금 반납 등 근로자들의 고통 분담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 때 회사측이 정리해고, 아웃소싱 등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원들은 `본 때를 보여줘야 회사가 정신차린다`며 150일간의 장기 파업에 들어갔다. 사실 노사 양측은 어려운 회사 사정을 감안, 어느 정도 양보할 계획이었으나 교섭을 해 본적이 없는 탓에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결국 폐업 절차를 밟게 됐다.
◇무리한 요구로 직장 잃어 = 서울 도심에 위치한 M호텔은 1급 호텔로 매출이 40억원이 넘었다. 하지만 회사는 하나를 수용하면 또 하나를 요구하는 노조의 비위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노사간 불신이 커지면서 파업이 잇달았고, 회사는 문을 닫기로 했다. 노조측은 위장폐업이라고 반발했지만, 120명의 종업원이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투쟁으로 생존기회 날려 = 문구회사 M코리아는 화의 등의 회생 절차가 실패하자 99년 초 프랑스에 본사를 둔 다국기업 BIG사에 매각을 추진했다. 노조는 체불임금 청산과 함께 협상과정 공개 및 노조의 협상 참여 등을 요구했다. 특히 `고용승계 없는 해외매각 반대`를 명분으로 가두 투쟁에 나서자 부담을 느낀 BIG는 인수 의사를 철회하고 말았다.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노사 불신이 폐업으로 = 건설업체인 H기업은 지난 99년 인수, 막대한 손실을 본 유가공업체에 노조가 생기자 더욱 큰 부담을 느꼈다. 이 때문에 노조위원장을 부당 해고하고, 회사 간부들이 텐트 농성장을 걷어 차는 등 `노조 깨기`에 들어갔다. 단체협상이 11차례나 열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회사측의 폐업, 노조의 파업 등이 이어졌고 오기 싸움으로 비화되면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됐다.
이밖에 이 책에는 신생 노조인 탓에 유연성이 부족했던 광주 D병원, 사장의 사위ㆍ아들ㆍ부인이 전면에 나서면서 `경영진이 돈을 빼돌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T특수기계, 대주주간 경영권 다툼에 노조를 끌어들였던 D교통 등 실패 사례가 실감나게 담겨 있다.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