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한반도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무모한 대의명분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지난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폐위한 서인들은 실리보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배금친명` 정책을 펼친다. 이는 중원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후금과 명나라의 관계를 고루 중시했던 광해군의 중립정책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열강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에 전쟁의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광해군이 중립적 등거리 외교를 취했던데 반해 새로이 정권을 잡은 인조는 한반도 주변정세를 무시한 채 배금친명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대의명분만을 강조한 배금친명 정책은 한반도를 전쟁의 화마로 몰아넣고 만다. 왕자시절부터 한반도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던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국호를 `청`이라 바꾸고 조선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명나라를 치기위한 파병요청을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이유로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실리외교를 중시하는 주화파(主和派)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척화파(斥和派)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조정대신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척화파는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대의명분을 저버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오직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었는데 도저히 오랑캐를 섬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수수에 불과했던 주화파는 “아무 대책 없이 명분을 내세우기는 것 보다는 나라의 장래와 백성을 위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으나,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경망하게 큰 소리를 쳐서 강대국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팽팽한 대립 속에 결국 조선은 척화론자들의 주장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고, 조선은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삼전도의 항복`을 하고 만다. 1936년 45일만에 막을 내린 병자호란의 이야기다.
500년전에 벌어진 치욕의 역사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다시금 그러한 불행한 역사가 이땅에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원한다는 대의명분 만으로 평화와 안전을 지킬 수 없다. 우리가 국제질서의 흐름에 현명하게 대응하는 실리외교를 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만이 한반도의 평화와 국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박진(국회의원ㆍ한나라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