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Culture&Life]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

"현실서 불가능한 꿈을 무대에… 그것이 뮤지컬이자 내인생"



난독증 앓다가 음악·춤 빠져 연극 주연배우까지 올랐지만
배우의 삶 접고 안무가로 전환
뮤지컬 '재즈' 참패로 값진 교훈… '오페라의 유령' '캣츠' 히트로 명성
홀로그램 등 무대기술 날로 발전… 미디어·콘텐츠 융합 모색할 것


지난 1992년 방송국 안무가로서 처음 만든 뮤지컬이 '쫄딱' 망했다. 집까지 팔아 마련한 돈 3억원은 흥행참패로 시원하게(?) 날아갔고 30대 청년은 빚더미에 앉았다. 사방에서 걱정과 안타까움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정작 돈을 '해먹은' 주인공은 이 시기에 행복을 느꼈단다. "정말 감사한 게 저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남 탓 하지 않고 '내가 뭘 잘못했나'를 생각하거든요. 비록 제집이 날아갔지만 이때 경험으로 뮤지컬도 하나의 산업으로서 경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3억원은 그 수험료였던 거고요." 빚을 지고도 행복을 느낀 긍정의 사나이는 비싼 수험료를 거름 삼아 이후 '오페라의 유령' '캣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위키드'의 국내 공연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한국 뮤지컬의 미다스의 손으로 떠오른다. 한국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이자 치밀하게 꿈을 좇는 돈키호테, 뮤지컬에 인생을 건 남자 설도윤(사진) 설앤컴퍼니 대표를 서울 학동 설앤컴퍼니 사무실에서 만났다. 요즘 설 대표는 말 그대로 한계에 맞서고(defying gravity) 있다. 뮤지컬 '위키드'와 '캣츠' 오리지널팀의 내한공연이 진행되고 있는데다 국내 초연 뮤지컬 '프리실라'가 8일 개막하며 눈코 뜰 새 없는 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다작 욕심을 내는 편은 아닌데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위키드'에 이번 '프리실라' 개막시기가 겹치면서 정신이 없네요." 인터뷰 당시 뮤지컬 '프리실라'는 개막을 하루 앞두고 한창 드레스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전 내내 리허설 현장을 지켰다는 설 대표는 "'프리실라'는 기존 작품들과 전혀 다른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며 배우들의 컨디션을 제일 먼저 챙겼다.


◇난독증 소년, 예술에 젖다=설 대표 본인이 무대 위 배우로서 활동한 경험 때문인지 배우에 대한 그의 애정과 배려는 남다르다. 설 대표는 대학 연극반과 극단 기성에서 9년간 연기를 했던 배우 출신이다. 어린 시절 '배우'라는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부모님이 엔터테이너셨어요. 제가 어릴 때 저희 동네에 전축 있는 집이 저희집뿐이었는데 부모님이 집에 춤선생을 모셔다 전축을 틀고 댄스 교습을 받으셨던 기억이 나요. 어린 저도 자연스럽게 춤과 노래를 따라 하면서 즐겼고요. 중학생 땐 야외전축을 동네 골목에 가져다 놓고 친구들이랑 공연도 할 정도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40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난독증도 설 대표의 문화경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40명 중 40등을 했었다"는 그의 농담에서 알 수 있듯 책 한 권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소년은 자연스레 음악과 춤·체육 같은 예체능에 빠져들었다.

◇배우, 그 고통의 시간=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그는 전공보다 연극반 활동에 몰두하며 무대에 심취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둔 뒤 극단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배우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981년 신촌 현대극장에서 오디션 공고가 났어요. 현대극장이 한국 최초의 뮤지컬 민간극단인데 제게 연기의 기본과 철학을 가르쳐준 곳이죠." 설 대표는 이후 세실·민중으로 소속을 옮기며 연극 '선인장 꽃' '말괄량이 길들이기' '나비처럼 자유롭게' 등에서 주연배우로 무대에 섰다. '나비처럼 자유롭게' 공연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관람하러 올 정도였다. "극장이 차가 못 들어오는 골목 끝에 있었어요. 정 명예회장이 서대문 대로에 차를 세우고 골목을 걸어 올라와 공연을 보고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공연을 본 뒤 금일봉도 두고 가 모처럼 극단 식구들이 회식했던 기억도 있어요(웃음)."

주연배우로 무대를 수놓았지만 설 대표에게 배우로 활동한 9년은 "인생 최고로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연기에 대해 제가 너무 심오하게 접근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고뇌도 많았고 작품이 끝나면 몸도 너무 아프더라고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데 배우로 살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설 대표가 배우들이 겪는 감정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 그들을 배려하는 이유다. "배우는 일생을 자기 인생이 아닌 남의 삶을 살아요. 자기 철학이 뚜렷하지 않으면 남의 인생만 살다가 가는 거죠. 그만큼 연기는 어렵고 배우의 삶도 힘듭니다."

◇교훈 된 첫 뮤지컬 참패=1986년 뮤지컬 '가스펠'을 마지막으로 극단을 떠난 설 대표는 한 방송국 상임 안무가로 들어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피날레 안무를 비롯해 뮤지컬·방송·CF를 넘나드는 독보적인 안무가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1992년 운명(?)의 작품을 만난다. KBS홀 개관기념 뮤지컬 '재즈'가 그 주인공. "개관기념으로 프랑스 뮤지컬 '재즈'를 제작했어요. 그때 집까지 팔아 3억원을 투자했는데 완벽한 흥행참패를 맛봤죠."

설 대표는 '뼈아픈 경험'을 '값진 수업'으로 해석했다. "뮤지컬 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인지도가 낮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게 첫 번째 실수였어요. 당시 KBS홀이 지금과는 달리 허허벌판 아스팔트 끝에 있었는데 공연장으로서의 접근성도 별로였고요. 무엇보다 산업적 접근이 전무했다는 게 가장 큰 패착이었어요." 3억원의 수업료는 전화위복의 밑거름이 됐다. 3년 후 무대에 올린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첫 경험'의 실수를 완벽하게 보완해 그야말로 흥행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설 대표의 '미다스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미다스의 손, 유령을 만나다=설 대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단연 '오페라의 유령'이다. 한국 뮤지컬은 2001년 '오페라의 유령'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의 흥행은 국내 뮤지컬 대중화와 산업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품을 들여오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장 16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문제였다. "투자를 유치하러 다닌 게 2000년인데 IMF 졸업 직후라 다들 여전히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때는 펀드도 없고 창투사 개념도 없고. 그래서 무작정 강남 현금부자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녔죠." 결국 설 대표는 5년치 공연계획서를 준비해 한 대기업 사장을 직접 찾아갔고 수차례의 설득 끝에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장애물은 다 넘었다고 생각한 그때 복병이 또 나타났다. 당시 공연장이었던 LG아트센터 구조상 공연장비가 반입되지 못하는 난관에 부닥친 것. 고심 끝에 설 대표는 외벽을 뚫지 않고 내부 엘리베이터를 개조하는 방식을 제안했고 LG아트센터 측도 구조변경에 동의해 무사히 공연을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됐다. "구조변경 비용을 내가 냈어요. 지금 LG아트센터에서 뮤지컬 공연이 가능한 건 내 덕이기도 해요(웃음)."

◇공연계 위축, 정책 노력 필요=국내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로서 한국 뮤지컬 시장에 대한 그의 애정도 뜨겁다.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이기도 한 설 대표는 최근 뮤지컬 시장의 위기를 강조했다. 세월호 참사로 공연관객이 줄어들면서 엎어지거나 연기되는 작품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사들은 '이대로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 시장을 살리기 위해 이뤄지는 정책적 노력이 없어요. 오히려 국가적 재난 이후 정부가 국민의 정서적 치유를 위해 공연을 장려해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산업을 죽이는 발언만 계속 하고 있어요." 설 대표는 이와 함께 기술융합을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그는 "기술발전 속에 뮤지컬 무대기술도 날로 변화하지만 한국은 아직 응용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최근 뮤지컬협회에 '융합분과위원회'를 만들어 미디어·기술·콘텐츠를 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뮤지컬 무대장비의 경우 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은 만큼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로봇이나 홀로그램 등 신기술 활용사례를 만들면서 성장방안을 모색하겠다는 게 설 대표의 구상이다.

뮤지컬인으로서 설 대표는 한계를 거부하고 새 길을 창조해냈다. 업계에서 그를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로 부르는 데 이견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설 대표 스스로도 '설도윤에게 뮤지컬이란'이라는 질문에 "내 인생 자체가 뮤지컬"이라고 답할 정도다. 남은 인생의 꿈을 묻자 설 대표다운 답이 돌아왔다. "공연은 꿈을 꾸는 거예요.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들을. 저는 그 불가능한 꿈을 현실의 무대에 계속 올리고 싶습니다. 관객이 폭풍 같은 감동을 느껴준다면 그걸로 내 인생은 행복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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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프리실라' 한국라이선스 초연

"관객들 '진짜 나' 드러내는 시간 됐으면"

"내 안에 있는 진짜 나를 드러내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설도윤 대표가 뮤지컬 '프리실라'(사진)의 한국 라이선스 초연을 통해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은 것은 '행복한 시간'이다. 무엇으로? 누구에게나 있는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의 분출을 통해서다. 호주 뮤지컬 '프리실라'는 등장인물은 물론 소품과 의상 하나부터 '평범함'을 거부한다. 아들이 있는 드랙퀸(여장남자) 틱, 철딱서니 없는 젊은 게이 아담, 왕년의 드랙퀸 스타이자 중년의 트랜스젠더 버나댓. 프리실라는 이 평범하지 않은 사내(?) 3명이 드랙퀸 쇼를 위해 버스 프리실라를 타고 호주 사막을 횡단하는 여정을 그렸다. 공연 내내 꽉 조이는 보디슈트와 타조 깃털, 플립플랍, 우산, 머핀을 형상화한 기상천외한 의상이 등장하며 '여자보다 더 여성스럽고 싶은' 3인의 욕구를 형상화한다.

설 대표는 "프리실라는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자신을 더 멋지게 꾸미고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은, 누구나 한번쯤은 바라온 욕구를 보여주는 게 '프리실라'의 핵심이자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이츠 레이닝 맨(It's Raining Men)' '핫 스터프(Hot Stuff)' '아이 윌 서바이브(I Will Survive)' 등 귀에 익숙한 팝송 넘버들을 들으며 어깨춤을 들썩이는 사이 관객들은 성 소수자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사랑·가족·우정을 발견한다. 섹시버스 '프리실라'는 오는 9월2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탑승할 수 있다.



He is...

△1959년 경북 포항 △1987년 KBS 상임 안무가 △1988년 올림픽개회식 한마당 안무 △1991년 SBS 예술단장 △1995년 서울뮤지컬컴퍼니 설립 △2002년~ 설앤컴퍼니 대표 △2004년 한국인 최초 미국 공연계 최대 인명사전 플레이 빌 프로듀서 등재 △2013년~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

◇주요작품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오페라의 유령' '라보엠' '캣츠'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에비타' '뷰티풀 게임' '아이러브유' '브로드웨이 42번가' '위키드' '애비뉴Q' '프리실라'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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