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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유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밑그림으로 여겨지면서 부수적인 것 혹은 습작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작가들은 대작 작업에 앞서 자신의 작품 연구와 고뇌를 종이 위에 부담 없이 쏟아 부었기에 종이는 순수한 예술혼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편리하면서도 효과적인 매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 회화인 동양화는 주눅이 들었고, 서양화에서도 수채화는 부차적인 장르로 치부하는 경향이 오래도록 지속됐다. 그래서 국내 미술 시장에서도 캔버스에 유화 작품은 제 값을 받는 반면, 수채화나 드로잉은 그 가치를 인정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마티스나 피카소 등 유명 작가들의 드로잉이나 수채화, 과슈(수용성의 아라비아 고무를 섞은 수채물감) 등 종이 작품이 독립된 장르로 당당히 인정 받으며 가격도 100억원을 호가한다.
우리 미술계에서도 작가의 예술적 감성이 세상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종이 작품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삼청로 갤러리현대가 근현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30인의 작가들의 종이 작품 120여점을 망라한 특별한 전시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을 내달 9일까지 선보인다.
1부에서는 이중섭·박수근·이인성·이응노·최욱경·천경자·김종학 등의 구상 작업을 만날 수 있다. 평생 캔버스에 그린 작품을 한 점도 남기지 않았던 이중섭(1916~56)은 종이, 그것도 하드보드에 유채를 칠하거나 종이에 수채화, 심지어 담배갑 은박지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일제 식민시대와 6.25 전쟁을 겪은 그에겐 아틀리에에서 이젤에 캔버스를 걸어놓고 물감을 사용할 수 없었던 궁핍의 연속이었다. 방바닥에 엎드리거나 작은 밥상 위에 놓고 그렸을 '소와 새와 게', '세 사람' 등 그가 남긴 작품들은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이라는 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박수근(1914~56)은 매우 가난한 화가였다. 미국에 있는 컬렉터 밀러 여사에게 보낸 편지 중 그림값 50달러는 돈으로 보내지 말고, 물감을 사서 보내달라고 한 구절은 그의 궁립한 생활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무와 두 여인', '모자(젖 먹이는 아내)'는 똑 같은 구도의 유화가 있지만 종이 작품에선 유화가 주지 못하는 선명한 선과 묘한 매력의 아우라가 풍긴다.
2부에서는 김환기·이응노·남관·김창렬·박서보·이우환·한묵·오윤 등 추상적이면서도 종이라는 매체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자의 형상을 한지 위에 콜라주하듯 배열해 동양적인 감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 이응노의 문자추상, 김환기가 말년에 종이 위에 그린 점 시리즈, 푸른 수채물감으로 한자의 획이 요동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이우환의 추상작품이 관객을 맞이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종이에 연필, 종이에 붓으로 그린 작품은 작가의 가슴 속에 담긴 예술혼을 쏟아내는 기본 재료이자 창작의 1차적인 결과물인 작품이 많다"며 "종이 작품에선 작가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만큼 근현대 작가들의 뛰어난 예술혼을 날 것 그대로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