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신년 인터뷰] 정구현 KAIST 경영대학원 교수

디스인플레이션 진입 … 부동산규제 확 풀어 자산디플레 막아야



경기 위축으로 투자·소비 줄면 부동산·주식 가격 떨어지고
고용 감소 등 침체 악순환

공공부문·대기업 중심으로 기술·사업 모델 혁신하고
기업인 사기 높여야 성장 가능


삼성전자 같은 금융회사 탄생… 관치 이어지는 한 20년은 걸려


문제에 대한 진단은 명쾌했고 해법은 거침없었다. 냉정하리만큼 현실적인 조언에서는 실물경제에 정통한 노회한 경영학자의 경륜이 묻어났다. "한국 경제는 디스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하락)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물가가 목표 대비 2년 연속 낮으면 디스인플레이션입니다. 그다음 단계가 바로 디플레이션(저물가 저성장)인데 이건 정말 무서운 거예요. 부동산 규제를 확 풀어 자산디플레이션을 막고 기업인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올해마저 낮은 물가에 3% 턱걸이 성장이라면 기업들이 정말 어려워질 겁니다." 정구현(사진)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대표적 민간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을 6년간 지냈다. 기업 경영전략과 국제경영의 대가로 통한다. 한마디 한마디를 넘겨들을 수 없는 이유다. "앞으로 성장은 혁신에서 나와요. 혁신은 한마디로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입니다. 위험을 떠안으면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대박을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입니까. 정부도, 이해집단들도 리스크를 피하기만 합니다." 정 교수는 서울 종로타워 집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꺼지고 있다"며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위험신호들을 차분하면서도 무거운 톤으로 경고했다.

한국 경제 '축소형 경제' 진입

그가 올해 한국 경제에서 가장 걱정하는 문제는 자산디플레이션이다. 경기위축으로 설비투자와 소비가 줄면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이 떨어지고 이것이 다시 설비투자 축소, 임금삭감으로 이어지는 경기침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이른바 '축소형 경제'다. 그는 "한국 경제가 오그라들고 있다"고 했다. 저물가는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다.

"일본은 디스인플레이션에서 디플레이션으로 빠진 사례이고 대만은 디스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디스인플레이션으로 복귀한 사례입니다."

대만은 지난 2001년부터 3년 동안 디플레이션에 진입하자 유동성 확대전략을 통해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했고 이후 11년간 실질 임금상승률을 3% 내리면서 가격경쟁력을 유지했다.

"물가가 낮으면 당연히 금리를 내려야지요. 내리면 가계부채가 더 확대될까 금리를 쭉 동결하고 있는데, 그건 정말 아니에요."

정 교수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이 어려운 이유가 임금에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는 해외매출을 많이 올려서 견딜 수 있지만 내수의존 기업은 이익이 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대만은 임금과 가격이 다 내려서 기업이 수익성을 유지했지만 한국은 가격은 내리는데 임금을 못 내려요. 대기업 강성노조가 주도하는 임금상승을 울며 겨자 먹기로 쫓아가는데 많은 급여를 줄 수가 없는 거예요.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지난해 30대 기업 중 12곳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못 냈다. 정 교수는 "내년에는 더할 거예요. 기업들이 살려면 급여를 내릴 수 없으니 고용을 줄이겠지요. 그러면 소비자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드니 물건이 안 팔릴 겁니다. 기업은 가격을 더 내립니다. 그게 바로 디플레이션이에요."

中 중심 세계질서 재편 예의주시하라

화제를 나라 밖으로 돌렸다. 미국의 출구전략이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에 대해 그는 "별로 걱정 안 한다"고 했다. "인도·인도네시아·터키는 힘들 겁니다. 경상수지 적자국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지요. 우리는 불황형 흑자이기는 해도 흑자를 내잖아요. 1997년 학습효과도 있고…."

그의 관심사는 중국이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과 비슷해지는 오는 2017년을 분기점으로 봤다. "향후 10년간은 중국의 성장에 따른 세계질서 재편이 제일 중요합니다. 미국의 견제가 강화되겠지요. 일본은 미국 편에 확실히 섰는데 한국은 북한 문제도 있고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도 높으니까 어정쩡한 상황이에요. 어떤 역할과 위치를 점할지 잘 정해야 합니다."

정 교수가 볼 때 중국 경제에 대한 한국 경제 의존도는 한계에 달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이뤄지면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이 1980년대에 '재팬 애즈(AS) 넘버원'이라며 잘난 척하니까 미국이 플라자합의로 한방에 보낸 게 기억 납니까. 그후 20년간 맥을 못 썼지요. 중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미국이 중국을 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만들어 견제한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민영화가 죄악?' 말도 안 되는 상황

대화는 자연스레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흘러갔다. "경제민주화, 사회복지 확대. 선거전략으로는 매우 좋았지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분위기가 경제성장과는 먼 쪽으로 가고 있고 규제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업과 경제 성장 관점에서는 아주 나빠졌어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창조경제는 민간기업 활성화에서 나오는데 우리 사회는 '민영화'를 얘기하면 무슨 욕설처럼 취급해요. 철도 민영화 안 된다. 영리법인 안 된다. 사회가 혁신·효율화와 반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민영화가 죄악이다? 말도 안 돼요. 공공기관 부채가 국가보다 많습니다. 민영화해야지요."

저성장 탈출 키워드는 혁신·효율화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서 탈출하기 위한 키워드는 뭘까. 그는 "혁신과 효율화"라고 답했다. "기술혁신, 사업모델 혁신 등 지금과 다른 방식을 시도해야 합니다. 물론 위험하지요. 충분한 보상도 따라야 하고. 아마 전통산업에서는 힘들 겁니다."

그가 희망을 읽는 것은 판교 테크노밸리다. "네이버·넥슨·NC소프트 등 굉장히 혁신적인 기업이 모여 있는 곳이잖아요. 정보기술(IT), 인터넷, 게임, 엔터테인먼트 같은 분야는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젊은 사람이 떼돈을 버는 것이 가능한 것. 그게 혁신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경제 전체로 볼 때 소수일 뿐이다. 공공 부문과 대기업은 혁신을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 "공공 부문은 보상이 없으니 혁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공공 부문이 확대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혁신과 반대방향인 거죠."

민간 부문 대기업도 새로운 사업도전으로 리스크를 짊어지기가 부담스럽다. "대기업 집단은 3세 경영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3세 경영자의 가장 큰 문제는 승계예요. 승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속세 등 자금을 마련해야 합니다. 본업을 소홀히 하고 승계에 매달리면서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어요. 제도 자체가 그렇습니다."


삼성전자 같은 금융회사 당장은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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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삼성전자 같은 금융회사가 나올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한국의 은행은 당분간 희망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유는 세 가지. "첫째, 국가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어요. 금융은 국가배경이 굉장히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진국 문턱까지 왔다고 하지만 통화·영어 등 국가 특유의 불리한 점이 여전히 많습니다."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둘째, 관치가 경쟁을 축소하고 있지요. 진입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물론 정부는 은행이 망하면 안 되니까 건전성을 감독해야 한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경영진이 3년마다 바뀌는 지배구조로는 장기적 안목으로 해외에 진출하기 어려워요."

현지 금융회사를 인수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정 교수는 "로컬기업을 인수해 경영할 능력도 부족하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굳이 은행이 아니더라도 보험·카드·증권회사 모두 역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그나마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 미래에셋 정도. 그는 1920년부터 국제화를 시도해온 노무라를 사례로 들었다. 노무라는 리먼브러더스 아태법인과 유럽법인을 모두 인수했지만 결국 다 실패했다.

"성급한 국제화는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삼성전자도 1982년 포르투갈에 최초 진출하고 30년이 걸렸어요. 외환위기가 15년 됐으니 잘하면 2030년쯤 한두 개 나올까? 최소 20년은 더 걸릴 겁니다."

역량 강화에 글로벌 M&A 활용해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인수합병(M&A) 시장에는 매물이 많이 나왔다. 한국 기업도 이 시장에서 '물건'을 많이 건졌다. 최근 노르웨이 유아용품 업체 스토케를 인수한 넥슨의 지주회사 NXC, 골프용품 업체 타이틀리스트를 인수한 미래에셋 등이 대표적인 예다.

정 교수는 "우리나라도 M&A 성공 케이스가 조금씩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해외기업 인수 경험이 많지 않았다. "기업이 국제화하려면 당연히 M&A 스킬이 있어야 해요. 이것은 금방 생기는 게 아니라 좋은 인력에 꾸준히 투자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도 작은 M&A는 성공사례가 많아요. 성주그룹의 독일 MCM 인수, 동원의 스타키스트 인수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지금도 좋은 M&A 매물을 노려볼 만하다고 했다. "2008년 위기 이후 좋은 브랜드, 기술기업이 많이 나와 기회가 좋습니다. 지난 3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시장이 좋을 것 같으니까 우리 역량이 부족한 몇 개 기업을 사면 괜찮을 겁니다."

가계빚 가장 취약…추가 금리인하 고려를

정 교수는 우리 경제의 가장 취약한 포인트를 가계 빚으로 봤다. 기업은 일부가 취약하지만 비중이 크지 않다고 했다. 문제는 영세자영업과 연결된 가계부채다. 그는 "지금 같은 부진이 계속되면 영세자영업자나 신용불량자들이 호전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며 "어떻게 해서든 경제를 살리고, 가처분소득을 올리고,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처방이다. "추가 금리인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자산디플레이션을 중단시키기 위해 아직도 옛날 패러다임에 묶인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지요." 정작 그가 더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에 나왔다. "기업경영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면 다 움츠러들어서 도망갈 생각만 합니다.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우리가 폐쇄경제라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일감 몰아주기 등 10여개 법안이 통과해보세요. 한국 기업도 떠날 겁니다. 물론 말은 못하지요. 행동은 그렇게 할 겁니다."






■ 정 교수의 통일 대비론

북한 급변 먼 이야기 아냐
미·중과 공조 강화하고 재원·인력 충원 준비

이연선기자

한국의 기업경영에 대해 평생을 연구해온 학자가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다. 하지만 정구현 KAIST 경영대학원 교수의 설명을 듣다 보면 북한 리스크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정 교수는 그의 저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서 한국 경제가 향후 15년간 직면하게 될 3대 리스크로 중국·고령화·북한을 꼽았다. 책에서는 "북한의 현실은 한국의 성취가 반쪽의 성공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제 '남'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고민할 때가 됐다는 의미다.

정 교수는 인터뷰에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처형 소식에 '아, 시작이다'라고 생각했다"며 "북한 체제가 근본적인 변화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나타났을 경우 대처방법에 대한 그의 설명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미국·중국 등의 지지를 토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다국적군이 북한에 들어간다. 행정과 군·대량살상무기를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 북한 주민의 생활을 안정시킨 뒤 남북한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북한 주민의 생활 수준이 남한의 일정 수준에 이르도록 한다.

당장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중국과 공조를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내부역량을 키워놓을 필요가 있다. 통일을 위해 미리 재원을 마련하기 어렵다면 경제운용에 있어 여유(slack)를 갖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내부역량은 크게 조세부담과 인력으로 나뉜다. 그는 "지금 증세하지 말고 세금을 올릴 수 있는 여지를 가져가야 한다"며 "통일 순간부터 모든 세금을 10% 올릴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놓든가, 부가가치세 세율을 10%에서 12%로 2%포인트 올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돈만큼이나 사람 준비도 필요하다. 그는 "의사·교사·행정요원·경찰·군인은 정원을 늘려놓아야 한다. 갑자기 통일되면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질 것"이라며 "지금 고민하는 과잉공급 문제는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약력 △1947년 서울 △1969년 서울대 경영학과 △1973년 미시간대 경영학박사 △1978~2003년 연세대 경영대 교수 △1992년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원장 △2003~2008년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2004년 한국경영학회 회장 △2008년 한국경영교육인증원 원장 △2011년 경기도선진화위원회 위원장 △2012년 제4대 자유기업원 이사장 △2013년 경기개발연구원 이사장 △현 KAIST 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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