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글로벌 포커스] "복지·환경등 좌파 이념 수용" 유럽 우파정당 '승승장구'

좌파, 정체성 모호·금융위기 대처 실패로 국민 신임 잃어<br>佛·伊 이어 獨 보수연정 출범… 英도 보수당 집권 점쳐


세계경제를 위기로 몰아 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식 시장경제에서 시작됐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향해 전세계가 맹렬한 공격을 가한 것은 당연한 결과. 최근 진행되는 각양의 국제공조는 단기적으로 위기극복이지만 장기적으론 새로운 경제체제 마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유럽은 중국 등 신흥국과 함께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도하며 시장규제와 정부개입을 인정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대안으로 내놓기도 했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최근 유럽에선 우파정당이 더욱 각광을 받는 상황이다. 지난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우파정권이 들어선 이후 올해 6월 유럽(EU)의회 선거에서 중도우파 성향의 '국민당 그룹'(EPP-ED)이 최대 정치그룹을 유지하는데 성공하면서 유럽의 우경화 경향을 명확하게 각인시켰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독일 총선에서도 이는 여지없이 적용돼 중도우파 성향의 집권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은 우파 성향의 자민당(FDP)과 함께 11년만에 보수연정을 출범시키게 됐다. 21세기 출발 당시만해도 유럽에선 중도실용 노선을 표방한 좌파정당들이 정권을 장악했었다. 지난 2000년에는 EU 15개 회원국 가운데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12개국에서 좌파정당이 단독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1년 덴마크에서 중도우파 정부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스웨덴, 핀란드, 그리스, 네덜란드 등에서 연이어 좌파정권이 몰락하면서 2009년 9월 현재 EU 27개 회원국 중 좌파정당이 집권한 나라는 공산국가인 키프러스를 포함해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등 4개국에 불과하다. 이렇듯 유럽의 좌파정당들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시장경제체제의 결함을 이용, 반사이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우파정당에게 정권을 내주는 기이한 현상을 빚고 있다. 유럽사회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모두 공감하면서도 우파세력이 정권획득에 성공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중도좌파의 모호한 정체성= 독일 사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146석(23.0%)을 얻는데 그쳐 지난 2005년에 비해 76석이나 잃으며 독일의 보수연정 출범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민당보다 이념적으로 더 왼쪽에 위치한 좌파당이 지지폭을 확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옛 동독 공산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좌파당은 총선에서 76석(11.98%)을 확보하며 원내 제4 세력의 위치를 차지하는 놀라운 결과를 거뒀다. 좌파당은 2005년 총선에서는 53석(8.7%)을 얻었으며 2002년에는 득표율이 5%(의석확보 가능한 최소 득표율)에도 못 미쳤다. 좌파당의 선전은 단순히 동독지역에서의 인기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다. 독일의 전통적인 좌파성향 유권자들이 지난 대연정 기간에 현대적 사민주의를 주창한 사민당의 노선 수정에 실망한 나머지 좌파색깔이 뚜렷한 좌파당으로 상당수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지난 4일 독일군 사령관의 지시로 행해진 나토군의 공습으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39명이 사망(아프간 정부 조사단의 공식 발표치)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독일 전역에서는 정부에 대한 강력한 성토여론이 일었다. 총선을 불과 20여일 남겨둔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비난까지 더해지면서 이 사건은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선거변수로까지 부상했다. 그러나 대연정을 통해 기민당과 정책공조를 이룬 사민당은 독일군 총 4,000여명을 나토군의 일원으로 아프간 전쟁에 파병하는데 동의한 전력이 있어 이 같은 호기를 막판 지지율 반등의 발판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반면 파병철수 입장을 고수했던 좌파당은 "다른 정당들은 모두 전쟁당"이라며 뚜렷한 좌파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체성이 모호해진 사민당과 차별화를 이루었다. 사민당은 독일 국민의 동독 공산당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의식해 그동안 의회에서 좌파당과의 연립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통적인 좌파 지지자들이 좌파당과 녹색당 등으로 더욱 분산되면서 사민당은 몰락을 자초했고 그 수혜는 결국 우파정당들이 입게 됐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메르켈 총리의 개인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60년만에 최저치인 33.8%의 득표율을 기록한 기민당 역시 승자는 아니다"라면서 "지난 4년간 대연정에서의 타협과 흥정으로 인해 두 거대정당(기민당, 사민당)의 정체성은 흐려졌고 이에 많은 유권자들은 실망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70.8%로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우파의 좌파이념 수용 = 최근 우파정당 득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유럽의 중도우파 세력이 사민주의적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각종 정책에 접목해 실행한 점이 꼽힌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럽의 중도우파 정당이 ▲폭넓은 복지정책 ▲국가제공 의료보험 ▲온실가스 배출제한 강화 ▲일부 국가주권의 EU 양도 등 좌파적 이념에 따른 상당수 정책을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우파정당이 근로층 세금감면, 금융규제 개선, 인구 고령화 등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좌파정당보다 더 유연하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유권자들에게 확신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내년에 좌우 정권교체가 유력시되는 영국에서도 감지된다. 지난 6월 EU 의회 선거에서 보수당, 영국독립당에게 패하며 3위(득표율 15.3%)로 전락한 집권 노동당은 금융위기의 대처과정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내며 국민의 신임이 심각할 정도로 훼손됐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모리의 지난 29일 조사에서도 노동당은 24%의 지지율을 기록해 보수당(36%)과 자유민주당(25%)에 뒤쳐지면서 내년 총선 전망을 더욱 어둡게 했다. 이에 내년 7월 총선에서 집권을 노리는 보수당은 노동당의 실정을 강조, 이로 인한 반사이익을 챙기면서도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전 총리의 냉혈 보수주의와는 다른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새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이는 데이비드 캐머런 현 보수당 당수가 취임과 함께 주창한 것으로, 그는 "더 공평한 사회,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진보적 보수주의자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천명하며 보수당이 그동안 경시했던 복지ㆍ환경ㆍ사회정의 등의 이슈에 적극 대처할 것을 강조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셸 비녹은 이 같은 중도노선 표방에 대해 "유럽 보수주의자들이 현재 흐름에 자신을 적응시켰다"라고 NYT에 말했다. ◇내년 7월 영국선거가 마지막 변수 =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축하 전문을 보내 "더욱 강화된 프랑스-독일 협상(entente)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와 관련, 두 나라가 내년에 선출될 예정인 초대 EU 대통령직에 합동후보를 내보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프랑스가 터키의 EU 가입을 강력 반대하는 가운데 독일도 정회원 인정에는 난색을 표하면서 터키에 '특별 동반자관계'를 부여하자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구나 독일 신임 외무장관으로 유력시되는 자민당의 귀도 베스터벨레 당수가 "EU 가입 기준을 충족하려는 터키의 노력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여서 앞으로 터키의 대응이 주목된다. 특히 내년 7월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집권에 성공하면, 프랑스 독일 영국 등 EU 내 주요국가들이 우파세력의 무대가 된다. 주제 마누엘 바호주 현 EU 집행위원장 역시 중도우파 성향인 점을 고려하면 EU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이 정치적 합의를 통해 우파정책을 고착화할 개연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EU 정책의 향후 방향성은 내년 총선에서 영국 유권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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