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일본 무사들은 독특한 가족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같은 부모를 둔 형제들과 그 자녀들을 기준으로 ‘가족’이라고 말하고, 그 외에는 ‘집안’ 또는 ‘씨족’이라고 말하는데요. 옛날 일본 사회에서는 ‘이에’(家)라는 가족을 장자(長子)와 그 형제, 그리고 먼 친척에서 부하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공동체로 봤던 것 같습니다. 이 가족이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방식도 독특했습니다. 장자가 살고 있는 거점에서 10명~20명 정도의 소규모 공동체가 출발해 가족의 시원(始原)이 되는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신들과 먼 친척들 간에 난상토론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지 말지를 정했습니다. 결심이 정해지면 모든 가족들이 ‘가독’(家督), 즉 집안의 장자에게 주군(主君)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함께 죽을 것을 서약합니다. 그리고 각지에 있는 가족의 은혜를 입은 자, 한때나마 밥을 같이 먹었던 친지들까지 한데 모아 대군(大軍)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전의 정권을 쓰러트리고 탄생한 것이 바로 일본의 막부(幕府)들이었습니다. 무사들이 통치하는 집단 지도기구를 말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위험까지 공유한다는 것. 엄청난 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그렇게 천하 쟁취에 성공하면 가족들은 각자 지분을 나눠 갖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경우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중세 일본사를 보면 전투에 패한 가족들이 어느 암자에 모여 염불을 하며 한 날 한 시에 동반자살을 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최후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일본식 집단 문화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끈끈한 연대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이런 결속력만 보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장자로 지명받은 이와 서자로 지명받은 이 사이의 갈등이 엄청났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집안을 상속하는 사람을 ‘적남’(嫡男)이라 하고 그 외의 구성원들은 모두 서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구분했습니다. 아예 다른 집안으로 성을 바꿔 ‘분가’(分家)를 시키거나, 대가 끊긴 가문의 양자(養子)로 보내버리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형제들 사이의 분란도 심해서 우리나라의 왕자의 난 못지않게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친형제 사이뿐만 아니라 양자로 들어온 사람과 기존의 친자식이었던 사람끼리 죽고 죽이는 전투를 벌였던 사례도 잦았습니다. 항상 피가 물보다 진한 건 아닙니다. 권력을 다루는 일에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때가 훨씬 많았죠.
최근 들어 연일 보도되는 정윤회 씨와 박지만 EG 회장 간의 갈등, 그리고 이에 얽힌 청와대 측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만 그대로 놓고 보면 일본 영주들의 가족사가 떠오릅니다. 가문의 자산과 상속 문제, 심지어는 결혼 문제까지 관리하는 인물을 ‘어내인’(御內人) 또는 ‘가령’(家令)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내인의 취향에 따라 장자 대우를 받을 사람이 바뀌기도 하고, 다른 친족들이 어내인을 도모하기 위해 일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이런 구도 하에서라면 정 씨는 박근혜 대통령 가족의 ‘어내인’이라고 볼 수 있고, 박 회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정치 권력을 승계하지는 않지만 엄연한 ‘장자’입니다. 그 와중에 나머지 법적으로 얽힌 청와대 비서관들은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사들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를 일본 가마쿠라 막부시대에는 ‘어가인’(御家人)이라고 불렀습니다. 한 마디로 진짜 가족 못지않은 가족입니다. 한때 보도되었던 ‘어내인’ 정 씨와 ‘장자’ 박지만 회장 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봐도 상당히 자연스러운 구도입니다. 이런 유형의 갈등은 누가 나선다고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서로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모해를 하기도 하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서 체제와 함께 몰락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이런 식의 내부 갈등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가족이 모이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한때 몽골을 일으켰던 칭기스칸 가족의 명언을 자주 인용했죠. “한 사람이 이루면 꿈이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꿈이 ‘동상이몽’이 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어느 평론가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런 의혹이 다뤄진다는 사실 자체가 계속 지적돼 온 소통 부족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선 그룹’ 이슈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와 상관없이 공정한 끝맺음이 생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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