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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앤디 워홀의 '플라워'와 '스마일링 재키', 사이 톰블리의 '볼세나', 그리고 김환기의 '무제', 박수근의 대표작 '노상의 사람들', 그리고 제프 쿤스의 '꽃'.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가 이른바 '비자금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이다.
왜 부자들은 그림을 좋아할까. 미술사적으로 인정 받은 작가의 생산량이 한정된 미술품이 갖는 안정적 수익성 때문이다. 자산 1억달러 이상의 슈퍼리치들은 투자 포트폴리오에 '미술품'을 별도로 마련할 정도로 미술에 대한 애착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벌'을 소재로 한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는 부자들의 미술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곳곳에서 노출돼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이 영화가 제65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미술과 부자, 즉 부호(富豪)들의 관계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 속 윤 회장(백윤식)의 방에 걸려 있다 그의 장례식 때 관 뒤쪽 벽을 채웠던 대형 그림은 화가 홍경택의 '레퀴엠'이다. 홍경택은 지난 200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출품작 '연필'이 648만홍콩달러(당시 환율 약 7억7,000만원)에 낙찰돼 홍콩 경매 사상 한국 현대미술 최고가 기록을 세웠던 인물. 작품이 고가이다 보니 '레퀴엠'을 빌려 영화에 사용하는 데 보험가만 1억3,000만원을 지불했다는 후문이다. 이 그림 실물은 서울 서소문동 대한항공빌딩 1층 일우스페이스에서 오는 7월4일까지 열리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백금옥(윤여정)과 아침 식사를 하던 윤 회장의 등 뒤로 보이는 작품 역시 홍경택의 '곤충채집'이다.
백금옥(윤여정)이 좋아하는 미술품을 걸어둔 갤러리 겸 거실에는 양쪽으로 노재운의 '뇌사경', 고산금의 '청풍계도' '무진기행' 등의 작품이 걸려 있다. 한국적 풍경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또 이 방 한가운데 프랑스 조각가 아르망(1928~2005년)의 '바이올린'이 차지하고 있다. 아르망은 소비문명에 대한 불합리성을 비판한 작가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는 한 컷 촬영에 대한 저작권료만 300만원씩이 지불됐다고 한다.
400평 대저택의 복도는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Organic Geometry)' 시리즈가 장식돼 있다. 홍승혜의 작품은 현대적 이미지로 어떤 공간에나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 속 재벌가 내부의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이다. 이외에도 아이슬란드 출신 에로, 미국 작가 짐 다인 등의 작품이 영화 곳곳에 걸려 있다.
임 감독은 영화 속 미술자문을 초대 아르코미술관장 출신으로 현재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아티스틱디렉터인 백지숙씨에게 일임했다. 덕분에 영화 속 주영작(김강우)이 "작품은 좋은데…"라며 말끝을 흐리던 대사에 사실성을 더해줄 수 있었다. 백씨는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르므로 그 자체가 재벌의 취미를 대변하거나 가격과 가치가 일치한다고 할 수만은 없다"며 "영화 '돈의 맛'이 해외에 알려질 기회가 많을 것으로 예상해 국내 작가의 작품을 더 많이 선보여 우리 미술도 알리는 계기로 삼자는 의도도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임 감독은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상당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작 '하녀'에서도 현대미술가 배영환의 대형 샹들리에를 등장시켜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